오피니언일반

심포리/이수남

~젊은 날의 운명적 불장난을 찾아서~

… 알프스에서 산악열차 푸니쿨라를 타고 필라투스 산으로 가던 중 굉음과 함께 열차가 갑자기 섰다. 목덜미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듯했다. 톱니바퀴 열차와 충격으로 인해 불현 듯 약 사십년 전 심포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리라 다짐한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큰 맘 먹고 강원도 심포리를 찾아간다. 심포리는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등록금을 벌기위해 몇 달 동안 짐꾼으로 일했던 곳이다. 심포리엔 톱니바퀴 열차가 있었고 그 옆으로 나무계단이 있어 짐꾼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심포리의 톱니바퀴 열차가 사라지고 폐선이 되는 바람에 기존 심포리역은 없어지고 새로운 심포리역이 생겼으나 그나마 완행열차도 서지 않는 한적한 역이 됐다. 물어물어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옛 심포리역은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폐허였다. 다행히 근처 청년회관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철암댁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앞서가던 여인의 자태에 욕정을 느꼈다. 발기된 남성으로 인해 걷기조차 불편하던 와중에 발을 헛디뎌 비탈로 떨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땐 여인의 품에 안긴 채 배수로에 처박혀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급히 옷을 벗어 제켰다. 그 후 몇 달 동안 두 사람은 심포리역에서 만나 인근 빈집이나 산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의 남편이 잠자리 현장에 들이닥쳤다. 나는 죽어라고 도망쳐 나왔으나 그 여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날이후 철암댁의 소식은 끊어졌다. 철암댁은 남편에게 눈 부위를 흉기로 찔려 한 눈이 실명하고 남편은 철암댁에게 세차게 떠밀려 뒤로 자빠지는 통에 뇌진탕으로 사망하였다. 철암댁은 6년을 복역 후 심포리역 인근에서 식당을 하고 있단다. 워낙 억척스럽게 일해 먹고사는 덴 지장이 없는 모양이다. 철암댁의 근황을 들은 후, 그 여인을 찾아가봐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인근 영동선 기적소리가 폐선 부지를 걷는 내 발길을 막아선다.…

한 평생 사는 동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남녀가 운명적으로 만나, 잊을 수 없는 사연을 만드는 경우가 없지 않다.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살을 섞는 일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만남의 장에서 의지를 갖고 서로 만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 일이야 일상적이다. 허나 계획되지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연히 환경에 갇혀 선택의 여지없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통상 남녀 간의 정사인 경우가 깊게 각인된다. 그런 횡재(?)가 왜 자기에겐 주어지지 않는지 부러워하기도 한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심리는 남녀관계도 마찬가지다. 막상 그런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우연한 일탈을 깊숙이 마음에 담아두고 떳떳이 터놓지도 못하면서 남몰래 얼굴을 붉히며 평생 되씹는다.

심포리의 추억은 아름다운 인연, 어쩌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다. 자기 때문에 철암댁이 불행하게 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슬픈 추억을 의식 아래로 가라앉혔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한 죄의식이 잠재했을 터다. 그러다가 톱니바퀴 열차와 머리 충격이라는 일을 매개로 그 기억이 의식으로 떠오른다. 추억의 여인을 만나 무릎 굻고 사죄하리라. 사죄는 둘째 치고 이젠 그 여인을 만나보고 싶다. 불장난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기적소리가 발길을 막아서는 걸 어찌하랴.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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