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주년, 한국전쟁과 대구문학

발행일 2020-07-05 16:41:0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향촌동, 한국 피란문단으로 화려한 시절 맞이하다

모나미 다방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단체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구상, 다섯 번째 오상순, 여섯 번째 조지훈이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쓰러뜨렸지만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의 싹은 돋아나듯이 전란을 피해 대구로 몰려든 문인들로 인해 대구는 새로운 문학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전쟁의 마지막 보루였던 대구의 도심 향촌동에는 ‘종군작가단’, ‘문총구국대’ 소속 문인들을 중심으로 휴전 시까지 임시 한국문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른바 전무후무한 ‘피란문단’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참상으로 마음이 긁힌 문인들의 절망과 피폐, 낭만을 근간으로 슬프고 화려한 문학의 꽃을 피웠던 당시 향촌동의 피란문단과 문학인들의 모습을 재조명해보는 작업이 대구문학관에서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 대구로 피란했다. 그중에는 대한민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수많은 예술가들도 포함됐다.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동리, 최인욱, 서정주, 유주현, 양명문, 오상순, 전숙희, 황순원, 최정희, 김윤성, 김송, 김팔봉, 구상, 정비석, 최태응, 유치환, 전봉건, 박인환, 장덕조가 그들이다.

살으리다방에서 열린 최인욱의 첫 번째 단편집 '저류' 출판기념회 장면
이들은 대구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대구 문화의 중심지였던 향촌동으로 모여들었다. 한국전쟁이 많은 것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대구문단을 한국문단의 중심에 서게 했다.

1950년대 피란문인들이 향촌동으로 모이게 된 것은 이곳이 종합문화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부촌이었던 향촌동은 다방과 음악 감상실, 극장 등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이곳에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고 문학 창작을 위한 영감을 얻으면서 자연스레 독특한 문단이 형성됐던 것이다.

대구로 터전을 옮겨온 피란문인들은 낯선 대구 땅에서 그나마 자신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 자연스레 대구 향촌동의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청포도다방, 백조다방, 모나미다방, 백록다방, 호수다방, 꽃자리다방, 상록수다방 등 많은 다방이 향촌동 일대에서 문인들의 안식처가 돼 주었다.

향촌동의 다방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문학적 결실을 확인하는 살롱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작품 발표를 위해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장소는 주로 그들이 자주 가던 다방이었다.

상록수다방에서 열린 박두진 시집 '오도' 출판기념회에서 축사하는 구상
1951년 모나미다방에서 이효상의 ‘바다’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1953년 상록수다방에서는 박두진의 시집 ‘오도’, 살으리다방에서는 소설가 최인욱의 첫 단편집 ‘저류’의 출판기념회가 각각 열렸다. 1956년에는 구상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꽃자리다방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구상이 그와 절친한 시인 오상순, 소설가 최태응과 자주 어울리던 곳이다. 오상순은 평소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인사말을 자주 했는데, 구상이 이에 영감을 받아 ‘꽃자리’라는 시를 발표했다. 꽃자리다방이라는 이름도 이 시에서 따온 것이라 전해진다.

한편 1950년대 향촌동에서는 전쟁의 와중임에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클래식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는 많은 대구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박용찬은 1951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음반을 가지고 대구로 피란했는데, 그 음반과 기기들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문화 공간 ‘르네상스’를 열었다.

르네상스는 전쟁의 소음 속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평화를 느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장소였기 때문에 군인과 기자, 그리고 문인을 포함한 많은 대구의 예술가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 전봉건, 조지훈, 박두진, 구상, 오상순, 정비석, 마해송, 김팔봉, 신동집 등이 그들이다.

1953년 살으리다방, 최인욱의 첫 단편집 '저류' 출판기념회. 춤을 받는 사람이 장덕조, 그 옆에 마해송, 창 밑에 앉은 사람은 김팔봉
또 대구로 피란한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부족한 물자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잠시나마 위안을 얻고자 했다. 때문에 당시 대구에는 많은 극장이 성업했다. 만경관, 대구극장, 송죽극장, 문화극장(이후 한일극장), 자유극장 그리고 군인들이 주 고객이었던 육군중앙극장, 공터에 천막을 치고 손님을 받는 천막극장 등이 있었다.

대구에 피란 온 문인들은 직접 연극 공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창군 6주년을 기념하는 예술제전의 일환으로 1952년 1월15일부터 사흘간 자유극장에서 ‘고향사람들’이라는 1막 2장의 연극을 선보인다. 문인극 ‘고향사람들’은 김영수가 극을 썼고 구상이 기획과 무대감독을 맡았으며, 최정희, 박영준, 유주현, 이덕진, 양명문, 박기준, 장덕조, 최인욱, 정비석 등이 출연했다. 마을 처녀 정옥과 결혼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구애하지만 정옥은 건실한 상이군인인 만수와 결혼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국전쟁기 대구에서 출판문화가 융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피란문인들은 군의 종군문인으로 활동하며 글을 기고했고, 대구의 출판사들은 이러한 군 관계 출판물들을 생산하며 성장했다.

종군작가 단체 사진으로 왼쪽에서 네 번째가 구상 시인이다.
당시 ‘육군종군작가단’에 소속됐던 문인으로는 최상덕, 김송, 박영준, 장덕조, 최태응, 조영암, 정비석, 김진수, 김팔봉, 구상 등이 있으며, ‘공군종군문인단’ 소속 문인으로는 마해송, 조지훈, 최인욱, 최정희, 곽하신, 박두진, 박목월, 김윤성, 유주현, 이한직, 황순원, 김동리, 전숙희, 박훈산 등이 있다.

한편 대구문학관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특별한 기획전시 ‘피란문단, 향촌동 꽃피우다’를 진행한다.

크게 3부로 나뉘는 전시는 ‘1부’에서 향촌동의 골목길을 배경으로 김동리, 마해송,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유치환 등 당시 대구로 피란 온 작가들의 모습과 글을 드로잉과 영상으로 전시한다. ‘2부’는 예술인들이 서로 교류했던 당시의 다방 모습을 재현하고, 많은 문인이 찾았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의 모습도 재현해 전시한다. ‘3부’에선 한국전쟁기 출간됐던 정훈매체 등 군의 출판물과 피란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10월3일까지 대구문학관 4층 기획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료제공: 대구문학관

전쟁을 피해 대구로 피란 온 작가들의 모습과 글을 드로잉과 영상으로 전시한 대구문학관 전시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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