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당(涵碧堂)은 안동시 서후면의 산골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정자이다(경북 문화재자료 제260호). 천등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절집인 개목사를 바라고 산길을 올라가노라면, 길섶에 동남쪽을 향해 두어 길 높이의 막돌로 쌓은 석축이 보인다. 그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함벽당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높다란 석축으로 말미암아 정자가 마치 누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쪽으로 난 작은 사주문(四柱門)을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정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T’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뒤편에 3칸의 온돌방 2개를 배치하고 가운데 칸 앞으로 2칸의 대청을 앞으로 길게 뽑아 놓았다. 평난간을 두른 우물마루 대청을 맞배지붕이 덮고 있다. 보통 정자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적 장식이 거의 없고, 사용된 목재 또한 우람한 맛이 없다. 그저 작고 소박하다는 느낌만 줄 뿐이다. 화려함을 경계했던 정자를 세운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



함벽당은 세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조선 명종 때의 절충장군 강희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마을 가야촌에 살면서 처음으로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함경당(涵鏡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외손자였던 북후면 도촌에 살던 옥봉 권위(1552~1630)가 정자를 물려받았다. 이 무렵 매원 김광계(1580~1646)가 인근의 봉정사를 유람하다가 함경당에 들러 친구로부터 주식(酒食)을 대접받은 일화가 그가 쓴 ‘매원일기’에 남아 있어, 함벽당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 후 함경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문과에 급제해 내외 관직을 역임하고 귀향한 류경시(1666~1747)의 소유가 돼 후학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다만 당호가 함경당에서 함벽당으로 바뀐 까닭은 이렇게 전해진다. 함경당의 새 주인이 된 류경시는 주위 사람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새로 당호를 짓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양 주실에 살던 외종형인 옥천 조덕린(1658~1737)이 그를 항상 “함벽주인(涵碧主人)”이라 칭했고, 문생과 후학들도 류경시를 “함벽선생(涵碧先生)”이라 부르면서 정자 명칭이 어느덧 함벽당으로 정착됐고 또 류경시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인 17세기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류경시가 작고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62년(철종13)에 대대적으로 중건했음이 건축 수법이나 ‘중건기’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온통 천지가 짙푸른 녹음 속에 묻혀 있는 이즈음에 함벽당 난간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푸르름 속에 잠겨 있는 집”이라는 당호가 가진 의미가 저절로 깨우쳐진다.





▲류경시과 함벽당 둘러보기

함벽당의 주인 류경시는 관향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흠약(欽若), 호가 함벽당(涵碧堂)으로 전주류씨 세거지인 안동 무실(水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집이 가난해 솔방울에 불을 붙여 밤새 책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니 세숫물이 먹물처럼 까맸다거나, 개목사에 들어가 ‘맹자’를 읽었는데 방에서 나와 주변의 나뭇잎을 보았더니 거기에 맹자의 글이 모두 쓰여 있더라는 일화 등이 그것이다. 아호가 천태공인 할아버지의 권유로 안동 풍산에 사는 고산 이유장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일 강원도 원주의 우담 정시한과 안동으로 돌아 온 갈암 이현일을 찾아가 학문을 물은 바가 있어, 그들의 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류경시는 1694년(숙종20)의 갑술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후, 폐서인이 돼 쫓겨났던 왕비 민씨(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했음을 기념해 시행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들게 됐다.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사, 평안도사를 거쳐 용강현령, 한산군수, 풍기군수, 양양부사, 순천부사를 지냈다.

그는 관료로서 생활하는 동안 특히 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일화 한두 가지만 소개해 두고 싶다. 황해도사로 부임했을 때 장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 아들이 이번에 시행되는 도회시(都會試)에서 합격할 수 있게 해달라며 꿩을 뇌물로 바치자, 그를 잡아 장형을 내리고 아들은 응시를 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소문이 알려져 평안도사로 재임 중에 평안도의 문교행정을 관찰사로부터 전적으로 위임받았는데, 강서현령 윤순이 도회시 고시관으로 참여했다가 “이번 시험에는 사적으로 청탁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은 공의 공정함과 염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아빠찬스’라는 말로 빈정대며 분개해 마지않는, 자식의 좋은 학교 진학을 위해 각종 부정을 꺼리지 않았던 어느 장관 역임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회 기득권층의 얼굴 두꺼운 표리부동함과 불공정성과 비교할 때, 공의 이런 일화는 한여름의 시원한 샘물 같은 청량감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는 특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후일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다.

용강현령으로 재임 중의 일이었다. 용강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교통로로서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재물을 비축해 두는 지칙고(支勅庫)가 두어져 있어, 거기에 은전 수만 꿰미가 비축돼 있었다. 이전의 현령들은 이를 유용해 백성들에게 고리로 빌려주거나 장사 자금으로 전용해 사복(私腹)를 채워왔다. 그러나 류경시는 그런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녹봉에서 엽전 8천 꿰미를 내놓아 믿을만한 읍내 사람 8명을 뽑아 관리하게 해 지척고의 부족분을 메꾸었다. 뒷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현명(1690~1752)이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참으로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엽전 2천 꿰미를 더 보태어 백성들을 도왔다고 한다. 조정으로 복귀한 조현명은 뒷날, 류경시를 ‘당금(當今) 제일의 목민관’이라 일컬었다고 전한다.

◆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을 높여

한편 그는 ‘문무겸재(文武兼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가 양양부사로 부임할 당시 강릉에서 양양에 걸친 일대에는 도적떼가 크게 번성해 조정의 큰 우환거리였다. 새로 부임하자 말자 그는 적당들이 여파령(黎婆嶺)에서 대관령(大關嶺)에 걸친 산중에 소굴을 마련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강릉태수와 힘을 합쳐 도적들을 소탕했다. 먼저 화전민 몇 사람을 포섭해 그들로 하여금 적당들을 회유하게 하는 계교를 써서 결국 적당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나 토벌 후에는 괴수 몇 사람만 처형하고 원래 양민들인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양민이 되돌림에 그 후 강양 일대가 평안해졌다고 한다. 학문에만 뛰어난 문신이 아니라 군사 운용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4) 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으로부터 기호지방 병영에도 이를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 잠시 금강산 유람을 떠났던 그는 즉시 양양으로 복귀해 군기를 보수하고, 군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태평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진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류경시는 밤에는 ‘육도삼략’과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를 강론하고, 낮에는 훈련을 시켜 5일이 지나자 제법 군용을 갖추게 됐다. 이를 직접 목격한 승지 이휘진과 정언 최규태 등이 “류공은 가히 문무겸재라 이를만하다.”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함벽당은 얼핏 소박하고 자그마한 정자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함벽당 류경시 선생의 맑은 정신이 깃들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답사 당일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함벽당 11대 종손 류건기(91)옹은 여전히 꼿꼿한 유자(儒者)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해 받은 류옹의 문집격인 ‘성헌만록(誠軒漫錄)’에 실린 각종 문장을 음미하면 유자의 풍취가 가슴에 아련히 와 닿는다. 또 선대 종손인 농포공도 퇴계학맥을 이은 근대의 선비⋅학자로서 문집인 ‘농포문고(農圃文稿)’와 1909년부터 1951년까지 40여 년 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보며 기록한 일기인 ‘농포일기(農圃日記)’를 남겼다.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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