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들이/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외가 가는 길, 홀아비바람꽃

대구·경북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의 창작 열기가 뜨겁다. 한때 한국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대구문학의 명맥을 묵묵히 이어가는 지역 문인들의 신간을 소개한다.

▲ 늦은 나들이
▲ 늦은 나들이
◆늦은 나들이/진용숙 지음/시와표현/136쪽/1만 원

분황사 주춧돌을 밟고 가는 가랑잎 따라/가을을 보냅니다/왕조의 흥망을 다 알고 있는 산천초목도/오늘은 성자처럼 말이 없습니다/ 탑을 지키는 돌사자마저/역사의 수레를 커다란 원으로 돌려놓는/ 결코 천 년은 저문 것이 아니었습니다/또 다른 천년을 채워가고 있었습니다.(가을편지-분황사 전문)

진용숙 시인이 시집 ‘늦은 나들이’(시와 표현)를 펴냈다. 1993년 등단한 시인이 27년 만에 펴낸 첫 시집이다. “평생 한 권의 시집만 갖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던 시인이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동안의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새 옷을 입히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번 시집에는 제1부 ‘지귀의 노래’, 제2부 ‘토끼풀을 뽑으며’, 제3부 ‘닮은 인생’, 제4부 ‘늦은 나들이’등 4개의 소제목으로 나눠 서정성을 띤 작품 73편을 실었다.

1993년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은 문화·예술··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서정시를 창작하고 시의 본령과 서정의 근원을 탐구하는 창작 활동을 해왔다.

시인이 발굴하는 서정의 진앙점은 서정시의 본질과도 같은 것으로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가 말한 회감(서정시에서 주체와 객체가 밀착하여 융화하는 현상), 혹은 상기라고 하는 작용에 의존하고 있다. 시인의 작품 중에서 서정적인 울림을 강하게 지니는 작품들은 모두 이러한 회감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시적 주제나 대상은 대체로 어머니와 관련된 것, 혹은 시간의 축적이 생성하는 서정과 시간의 흐름이 야기하는 상실감, 내면의 풍경을 풍부하게 해주는 외적 풍경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황치복 교수는 “진용숙 시인의 시적 매력과 특징은 지금, 여기에 없는, 그리움의 대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어머니의 이미지가 ‘‘흰빛’’의 색채 이미지로 조형되면서 맑고 정갈한 상징을 빚어낸다”고 했다.

진용숙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경북지회장을 지냈으며 한국문협, 경주문협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정훈교 지음/시인보호구역/112쪽/1만 원

시인 정훈교가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를 출간했다.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문득이라는 말’, ‘Nurota, 게으른 주정뱅이’ 등 61편의 시가 실렸다.

이번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는 작가의 두 번째 시집으로,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붉은 서정’의 연장선이다.

문학평론가 김춘식은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이 겉으로 보면 평이한 듯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섬세한 결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며 “난해하거나 어려운 단어들을 의식적으로 구사하거나 언어의 실험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시적 언어는 다른 어떤 시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다.

2010년 종합문예지 ‘사람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또 하나의 입술’과 시에세이집 ‘당신의 감성일기’를 출간한 바 있다.

시인에게 ‘당신’과 ‘붉음’은 그 경계의 지점에 존재하는 정서이고 대상이다. 당신이라는 호명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 이전의 ‘현상’을 암시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붉음’’이라는 정서를 통해 구체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 속에 나타난다. 이 호명은 본질과 현상을 가로지르는 기록 혹은 관찰을 시도하는 시인의 정신적 특징을 함축하는 중요한 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의 흐름은 두 번째 시집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이른 아침이 와도/당신의 이름을 지우는 일은 여전히 외로워/어제처럼, 후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면/후후후 바람이 불 것 같은/가난한 이름’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중)

시인은 ‘당신’을 늘 갈구하지만, 동시에 혼자이고 싶어 한다. 사실은 혼밥 조차도 멀찍이 두고 홀로이고 싶어 한다. 홀로의 시간을 오롯이 견디고 나서 당신을 떠올리고 있다. 그렇게 어느새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낼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 외가 가는 길, 홀아비바람꽃
▲ 외가 가는 길, 홀아비바람꽃
◆외가 가는 길, 홀아비바람꽃/김태수 지음/도서출판b/167쪽/1만 원

김태수 시인의 신작 시집 ‘외가 가는 길, 홀아비바람꽃’이 출간했다. 4부로 구성된 64편의 시들이 수록돼 있다.

이 시집은 개인사와 가족사, 민족사, 세계사가 중첩적으로 직조된 시집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있어도 외가에 가지 못하는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한반도에서만 쓰여 질 수 있는 시집이다. 그런 만큼 외가를 향한 그리움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외할머니 집/봉분 위로 불쑥 돋아난 아카시나무를/막냇동생이 톱으로 자른 며칠 후/붓에 제초제 발라 살살 돋아나는 눈물/도라산역 위성사진이 가리킨 자강도 희천시/또 보인다, 청천강 합수머리 까만 마을들/오오, 외할머니 5척 작은 몸/어쩌면 고향 쪽으로 돌아누워 계실지도 모를/조그만 외할머니 집

시인 자신이기도한 시적 화자의 외가는 평안북도 희천군 신풍면이다. 그곳은 시인의 표현처럼 ‘적유령과 묘향산맥 나란한 곳’이다. 또 시인은 ‘아버지는 일제 말기 사범학교를 나와 공립소학교 훈도 발령 초임지인 평안북도 희천에서 무남독녀 어머니를 만나 남남북녀의 짝을 이루어 결혼을 했다’면서, ‘딸 신행길 따라 내려온 외할머니는 분단과 전쟁으로 외갓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잠시 내려온 경상도 / 생면부지의 처소에 갇혀버린다’고 적었다.

이후 시적 화자나 가족에겐 외가란 주소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70년이라는 분단의 세월 속에 외할머니의 호적 주소는 지명 변경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외갓집은 주소조차도 없는 곳이 되고 만다.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갈 수 없는 곳이 되 버린 것이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시인은 삶이 곧 시, 한 편의 시에 한 편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생각으로 1978년 시집 ‘북소리’를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농아일기’, ‘베트남, 내가 두고 온 나라’, ‘겨울 목포행’,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가 수록된 ‘황토 마당의 집’, ‘땅 위를 걷는 새’ 등이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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