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나의 이력서/ 김원중

서울대학교를 안 나왔습니다/ 미국 유학도 못 갔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살았으니까요/ 기독교 장로도 못 되었습니다/ 일요일도 하루 종일 일했으니까요/ 시골 초등학교만 빼고 중·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12년 꼬박 야간에만 다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두고 박사, 교수, 시인이라고 불러줍니다/ 여학교의 단발머리 여학생 제자 천 명/ 영남이공대학의 국어수업 받은 제자 이천 명/ 대구 한의대에서 배운 제자 육백 명/ 포항공대 제자 사천 명이나 되지만/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청구 푸른마을 4층 아파트/ 우리 집 방구들 위에 혼자 누워서/ 허무한 이력서를 다시 써 봅니다

「대구문협대표작선집」(대구문협, 2013)

‘나의 이력서’는 시인이 살아온 역정이자 개인사이다. 누구나 살아오는 동안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자랑스러운 일, 아름다운 일도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부끄러운 일, 후회스러운 일도 가슴에 맺혀있다.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남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괴감에 빠져 자기 신세가 고달파진다. 그러나 자신의 역정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은 단순히 특정 과거사를 회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때때로 덧없는 상념에 젖곤 한다. 운명에 대한 야속함 또는 막연한 원망이나 허전함이랄까. 시기나 질투에서 째여 나오는 감정이 섞여들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던 최선의 길로 가지 못했던 데 대한 자책과 원망도 담겨있다.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나 변명이 겹친다. 과거의 불확실한 상상이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에서 기생하는 과거 사실의 가정이다. 딱 꼬집어 말하긴 곤란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역사가 달라졌듯이 자신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인생이 백팔십도 확 달라졌을 것이다. 일류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 명문대학교로 유학도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 좋은 직장을 얻어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을 텐데. 더 예쁜 여자와 살면서. 지금 당하는 생활고도 없을 것이고 자신의 인생은 화려한 꽃길일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면 사주팔자가 원망스럽다. 억울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한심스럽다.

한편 다른 생각도 든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더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죽도록 노력한다면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 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간다. 개천에서 용 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렵고 혼란한 시대였기에 반칙을 써서 새치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력으로 묵묵히 노력해 엘리트코스를 밟아 성공한 사람들이 그래도 대다수다. 결국 모두 자신 탓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이마빡에 꿀밤이라도 한 대 주고 싶다. 실없이 웃고 만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 그런 와중에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난삽하게 살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박사, 교수, 시인으로 불리는 것만 해도 가문의 영광이다. 제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대강 짚어본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을 터이다. 가끔 제자들이 찾아온다. 오늘도 지팡이 짚고 산책길에 나선다. 고희가 되어서야 겨우 인생의 참 뜻을 깨닫는다.

힘든 환경 속에서 역경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주저앉지 않고 주경야독한 끝에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온 역정이다. 아들 딸 낳고 밥 굶지 않으면서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살아온 삶이다. 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따스하고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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