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들판/신춘희

군사주의 밀어내고 민주주의 왔지만// 자유 평등 평화는 정착되지 않았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광고 속 카피였다// 툭 하면 바람이 가슴을 할퀴다 가고// 눈비 서리 우박, 가래처럼 질척여도// 희망의 날을 꿈꾸며 저항 없이 순응했다// 이제는 믿지 않는다, 공허한 미사여구// 그것은 전체주의의 아편주사 같은 것// 들판은 비폭력의 땅, 정직이 국시다

-시조집, 「식물의 사생활」(동학사, 2020)

신춘희 시인은 울산 출신으로 198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풀잎의 노래」, 「득음을 꿈꾸며」, 「중년의 물소리」, 「늙은 제철소」, 「어둠의 안쪽은 환한가」, 「식물의 사생활」이 있다. 착한 나의 노래가 녹두빛 심장이 돼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서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앞에 늘 좌정한다.

‘들판’은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하고 있다. 아홉 줄 안에 또한 그 행간 사이에서 못 다한 말들이 무수히 들락거리는 것을 느낀다. 시대 상황에 대해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면서 발언대에 선 연사처럼 거침없이 속사포로 쏘아붙인다.

군사주의를 밀어내고 민주주의가 왔지만 자유 평등 평화는 정착되지 않았다, 라고 대놓고 비판하면서 어떤 정치가가 모토로 내세운 바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주창에 대해 광고 속 카피였을 뿐이었다고 단정한다. 이와 같은 화자의 생각은 이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 뜻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대다수의 소시민은 툭 하면 바람이 가슴을 할퀴다 가고 눈비와 서리 우박이 가래처럼 질척여도 희망의 날을 꿈꾸며 저항 없이 순응을 했지만,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고 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바람과 눈비와 우박을 막아줄 정치사회적 제도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어서다.

그래서 화자는 공허한 미사여구를 이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아편주사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그럴싸한데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그것은 탁상공론이 될 공산이 크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울 때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책이나 공약을 제시하기 전 면밀한 검토와 철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들판’은 끝으로 말한다. 들판은 비폭력의 땅인 만큼 정직을 국시로 삼아야 한다고. 국시가 무엇인가? 국민 전체가 지지하는 국가의 이념이나 국정의 근본 방침이지 않는가? 화자는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는 결구에서 이 땅의 정치에서 가장 미흡한 덕목인 정직을 전면에 내세워서 모든 국민과 함께 지도자들의 정직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런 시적 논리를 펼치게 됐을까? 우리 사회가 너나할 것 없이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있어서다. 타자애가 결핍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서정적이 제목인 ‘들판’은 우리 모두 깊이 자성하고 올바른 길을 향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시편이다.

그런 점에서 시절가조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시대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답하고 대응함으로써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의 땅인 들판은 풀과 곡식이 자라고 소와 말이 뛰놀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돼야 마땅하다.

정직이 우리 사회를 어기차게 견인하는 역동적인 활력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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