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불국토로 인연지어진 땅, 석가 이전에 가섭불이 있었던 땅

▲ 신라에는 석가모니 이전시대에 이미 일곱 군데 절이 있었다. 칠처가람이라 전한다. 황룡사도 그 중의 하나다. 전불시대 황룡사에 가섭불이 있었고, 황룡사9층목탑의 심초석 위에 올려진 절개된 바위가 가섭불의 연좌석일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에는 석가모니 이전시대에 이미 일곱 군데 절이 있었다. 칠처가람이라 전한다. 황룡사도 그 중의 하나다. 전불시대 황룡사에 가섭불이 있었고, 황룡사9층목탑의 심초석 위에 올려진 절개된 바위가 가섭불의 연좌석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9편 중 네 번째가 탑상편이다. 탑상은 30여 꼭지의 탑과 불상에 대한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탑상편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가섭불연좌석이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의 일곱 부처 중 여섯 번째 부처로 석가모니의 스승이라고도 전한다. 가섭불연좌석은 가섭부처가 앉아 참선하던 자리라는 뜻이다. 황룡사에 가섭불이 참선하던 자리가 있다고 일연스님이 소개한 것이다.



신라는 불교와 일찍부터 인연이 지어진 땅이다. 석가모니 이전부터 칠불이 신라 일곱 곳의 절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려 했다.

▲ 황룡사 터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금당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의 기초석이 드러나 보인다.
▲ 황룡사 터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금당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의 기초석이 드러나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금당의 주춧돌이나 불상을 떠받치고 있었던 대좌, 탑의 기초석과 같은 석물들에서 지나간 시대의 일들을 유추해 볼 뿐이다.



가섭불연좌석 또한 삼국유사 기록이 남긴 오랜 시간 이전의 사실들을 더듬어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 어떠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일까. 한 겹씩 벗겨보는 학자들의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불가사의한 이야기, 가물가물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희미하게 남은 흔적에서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의 연좌석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본다.

▲ 황룡사 금당터를 개망초가 둘러싸고 하얗게 꽃피우고 있다.
▲ 황룡사 금당터를 개망초가 둘러싸고 하얗게 꽃피우고 있다.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서 모두 “신라 월성 동쪽의 용궁 남쪽에 가섭불 연좌석이 있다. 이 땅은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절터였다. 지금 황룡사 땅은 곧 일곱 절터 중 하나”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은 계유년(553)인데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의아하게 여겨 황룡사로 고쳐지었다. 연좌석은 불전의 뒷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한번 뵌 적이 있다. 돌의 높이가 대여섯 척은 되고, 둘레가 거의 세 주쯤 되는데, 깃대처럼 우뚝 서 있고 이마 부분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지은 다음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는 깨진 곳이 있었다. 절의 승려가 철을 발라 보호하고 있었다.



찬한다. 지나온 부처님의 시대 다 적지 못하나/ 오직 연좌석은 남아 의연하구나/ 뽕나무밭은 몇 번이나 바다로 변했던가/ 외로이 우뚝 서 상기도 변함없네.

▲ 가섭불이 주석했을 황룡사 금당에 장육존상과 십대제자 등의 불상대좌가 남아 있다. 대좌석의 크기로 불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가섭불이 주석했을 황룡사 금당에 장육존상과 십대제자 등의 불상대좌가 남아 있다. 대좌석의 크기로 불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얼마 후 몽고군의 침략을 받은 다음 불전과 탑은 타버렸고, 이 돌 또한 매몰되어 거의 땅 높이와 비슷해졌다.



아함경을 살펴보자. “가섭불은 현겁의 세 번째 부처님이시다. 사람 나이로 2만세 때에 세상에 나타나신다.” 이를 근거로 증감법을 가지고 계산해보자. 성겁의 처음에 매번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사셨다. 점점 줄어서 나이가 8만세에 이르렀을 때가 주겁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백년에 1세를 줄여 10세를 누리셨을 때 1감이 되며, 또 늘어나 사람의 나이 8만세에 이르렀을 때 1증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감과 20증이 1주겁이다.



1주겁 가운데 1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다. 지금 우리 스승 석가는 네 번째 부처님이시다.

▲ 황룡사 금당터에서 서쪽으로 보면 황룡사역사문화관과 멀리 선도산이 보인다.
▲ 황룡사 금당터에서 서쪽으로 보면 황룡사역사문화관과 멀리 선도산이 보인다.


석가세존부터 지금 지원 18년 신사년(1281)까지는 세월이 벌써 2천2백30년이다.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만 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조정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었는데 “금나라 정우 7년 기묘년(1219)으로부터 거꾸로 세어서 4만9천6백여 년에 이르면 반고가 개벽한 무인년이다”라고 했다.



여러 경전을 살피건대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이 돌의 수명이다. 그러나 겁초 개벽할 때부터 시간에 비하면 어린애다. 세 사람의 설명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개벽설에 대해서 몹시 소홀했던 것 같다.

▲ 개망초가 피어있는 황룡사 금당터에서 남쪽으로 보면 경주 남산이 가깝게 보인다.
▲ 개망초가 피어있는 황룡사 금당터에서 남쪽으로 보면 경주 남산이 가깝게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

신라 눌지왕 때 왕궁의 동쪽에 용궁사라는 절이 있었다. 용궁사 앞뜰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고, 황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절의 주지는 가섭이라는 스님으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도인처럼 생긴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가섭은 평소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상적인 대화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며 상대를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가섭은 낮에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절 뒤편에 사람 키 높이의 돌기둥 위로 올라가 날이 밝을 때까지 참선에 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또 어떤 날은 3일 밤낮으로 석주에서 기도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 황룡사는 입구 남문에서 중문, 황룡사9층목탑, 금당, 강당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죽 이어서 있다. 우물지와 강당, 회랑 등의 절터가 남아있어 안내표지판이 이를 그대로 표시하고 있다.
▲ 황룡사는 입구 남문에서 중문, 황룡사9층목탑, 금당, 강당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죽 이어서 있다. 우물지와 강당, 회랑 등의 절터가 남아있어 안내표지판이 이를 그대로 표시하고 있다.


가섭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그에게 지도받으려는 승려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궁사는 서라벌의 백성들은 물론 국내외에서 몰려드는 사람으로 북적거리며 서라벌의 중심이 되자 왕실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바다 건너 천축국에서 여러 승려들이 용궁사로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중 귀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며 기이하게 생긴 싯달타라는 승려가 있었다. 싯달타는 가섭과 문답을 시작하면 하루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몰입했다. 그가 후에 부처가 되었던 석가모니다.



눌지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백제와 왜는 첩자를 보내와 정탐하며 수시로 국경을 침범해 오는 통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용궁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자 왕궁에서는 백제 등의 첩자들이 활동하는 근거지가 될 것으로 우려해 감찰부에서 조사를 했다.



사실 용궁사에는 백제와 왜의 첩자들이 승려를 가장해 숨어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가섭은 왕궁에서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자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백제와 왜에서 오는 첩자들을 선별해 왕궁에 은근히 밀지를 넣어 알리기도 했다. 가섭은 또한 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신라를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끝내 왜의 첩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왕궁의 군사가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왜의 첩자 긴모리와 언쟁 끝에 조사하던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 분황사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황룡사지를 둘러볼 수 있게 산책로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 분황사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황룡사지를 둘러볼 수 있게 산책로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왕실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전국의 사찰을 모두 문을 닫게 명령을 내렸다. 신라에 일곱 군데서 운영되고 있던 절이 모두 산문을 닫고 폐사에 이르렀다. 용궁사의 문도 굳게 닫혔다.



가섭은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궁사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섭불연좌석만 벌판 가운데 우뚝 서서 절이 있었던 곳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가섭불연좌석은 그냥 두었다.



승려들과 불교를 공부하던 신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신라의 불교는 반짝 번창하려다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불교의 씨앗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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