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를 하다가/ 윤일현

발행일 2020-08-09 13:53: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누렇게 뜬 시집에서 나온/ 빛바랜 흑백 명함판 사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서가에 몸을 기댄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좌충우돌하며 돌아다녔건만./ 세월은 모든 것을 탈색하여/ 내 젊은 날들 결국은/ 5x7cm의 작은 평면 속/ 흑과 백, 명과 암으로 정리되는구나.// 세상의 모든 색채 흑백 속에 가둘 수 있지만/ 그 색채들 또한 흑백에서 갈라져 나옴을./ 밝음 끝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 다하면 새 빛이 돋아남을,/ 명과 백, 암과 흑만으로는/ 혁명도 사랑도 형상을 가질 수 없고/ 흑과 백, 명과 암은 서로 기대고 있음을,/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흑백의 풍경 밖으로 나와 보니// 지나온 길 아직 먼지 자욱하고/ 가야할 길 안개 속에 아득하다/ 강산이 몇 번 바뀌었건만/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 여전히 그대로 부여잡고 있는/ 앙상한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새벽별 하나 가슴에 안겨주고/ 가장 따뜻한 시로 나를 덮어준 후/ 그 시집 다시 서가에 고이 꽂아주며/ 불쑥 찾아온 현기증을 다스린다.

「시와반시」 (2015년 겨울)

책은 애물단지이거나 잘해야 계륵 정도다. 공간만 차지 할 뿐 활용성이 떨어진다. 인터넷 검색이 강력하고 e북 시장까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책은 밉상이다. 그 와중에 눈까지 침침해지면 책은 좌불안석이다. 집값이라도 들썩거리는 날엔 책이 설 자리는 더욱 좁다. 여유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집안을 둘러본다. 방을 가득 메운 책들이 눈을 내리깐다.

보관할 책과 버릴 책을 분류해본다. 벌써부터 생각해온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마음 먹고 일을 벌인다. 한쪽으로 완전 기운 책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살 땐 나름대로 살만해서 구입한 터라 막상 버리려고 하면 나중에 볼 것 같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여 망설여진다. 버리기로 마음먹어도 조금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들춰본다. 선 채로 읽다가 그 내용에 빨려 들어가 급기야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좋은 책이 책장에 꽂혀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책갈피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굴되기도 한다. 사진이나 단풍잎이 숨어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끔 빳빳한 지폐도 나온다. 고액권이었을 지폐가 이젠 화폐수집용으로 밖에 쓰임새가 없지만 마음은 즐겁다. 사진은 추억이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든 시인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 살짝 어지럽다.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용케 견뎌낸 그녀석이 흑백 명함판에 갇혀 결연한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복잡한 사연들이 흑백으로 녹아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흑 속엔 모든 색이 들어있고, 백 속엔 모든 빛이 모여 있다.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오고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온다. 흑과 백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일 뿐더러 그 근본이 서로 닿아있다. 흑만으로 표현되지 않고 백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흑과 백이 상호 조율하고 협조해야만 사물과 사연이 담기고 정리되는 사실을 흑백사진이 생생히 증언한다. 흑백논리는 금물이라는 것을 새로이 깨친다. 그땐 오직 한쪽만 본 고집스런 외눈박이였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흑백 세상에서 컬러풀 세상으로 귀환한다. 지난날은 먼지 앉은 책처럼 뿌옇고 누런데 가야할 길은 안개 속이다. 욕망을 내려놓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앙상한 모습이 안쓰럽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흑백사진을 시집에 살짝 재워 서가에 꽂는다. 어지러운 세상이 다시 깨어난다. 현기증은 타임머신 멀미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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