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반시」 (2015년 겨울)
책은 애물단지이거나 잘해야 계륵 정도다. 공간만 차지 할 뿐 활용성이 떨어진다. 인터넷 검색이 강력하고 e북 시장까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책은 밉상이다. 그 와중에 눈까지 침침해지면 책은 좌불안석이다. 집값이라도 들썩거리는 날엔 책이 설 자리는 더욱 좁다. 여유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집안을 둘러본다. 방을 가득 메운 책들이 눈을 내리깐다.
보관할 책과 버릴 책을 분류해본다. 벌써부터 생각해온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마음 먹고 일을 벌인다. 한쪽으로 완전 기운 책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살 땐 나름대로 살만해서 구입한 터라 막상 버리려고 하면 나중에 볼 것 같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여 망설여진다. 버리기로 마음먹어도 조금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들춰본다. 선 채로 읽다가 그 내용에 빨려 들어가 급기야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좋은 책이 책장에 꽂혀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책갈피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굴되기도 한다. 사진이나 단풍잎이 숨어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끔 빳빳한 지폐도 나온다. 고액권이었을 지폐가 이젠 화폐수집용으로 밖에 쓰임새가 없지만 마음은 즐겁다. 사진은 추억이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든 시인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 살짝 어지럽다.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용케 견뎌낸 그녀석이 흑백 명함판에 갇혀 결연한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쥔다.
흑백 세상에서 컬러풀 세상으로 귀환한다. 지난날은 먼지 앉은 책처럼 뿌옇고 누런데 가야할 길은 안개 속이다. 욕망을 내려놓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앙상한 모습이 안쓰럽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흑백사진을 시집에 살짝 재워 서가에 꽂는다. 어지러운 세상이 다시 깨어난다. 현기증은 타임머신 멀미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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