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겸재의 물안개-인왕제색도/ 윤금초

겸재의 물안개-인왕제색도/ 윤금초

빗기 아직 덜 가신 산녘/ 물안개 인왕을 가둔다.// 주저 않고 그어 내린 저 준법 바위벼랑/ 물소리 댓바람소리 여름한낮 떠메고 간다.// 숨 돌릴 겨를 멀리/ 단숨에 녹여낸 듯/ 먼 산 검정 암벽, 가까운 산 미점으로// 검푸른 인왕의 낯빛 에누리 없이 받아낸다.

「좋은시조」(2020, 여름호)

윤금초 시인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 입상과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어초문답」, 「땅끝」, 「무슨 말 꿍쳐두었나?」, 「앉은뱅이꽃 한나절」 외 다수가 있다. 그는 현실적 시간 속에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는 우의로서의 시조의 가능성을 연 시인이다. 반세기 넘는 성상 동안 남다른 시조사랑으로 창작과 더불어 시조이론서 저술과 후학 양성에도 힘써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시인들은 그림을 보고 시를 쓸 때가 많다. 특별한 감흥이 일어나면 속으로 오랫동안 궁굴리다가 한 편의 시로 완성한다. 이처럼 시는 그림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시를 보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물안개’도 그러한 연유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5세인 1751년 비온 뒤의 인왕산 정경을 그린 것이다.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았던 정선이 비온 뒤 맑게 개고 있는 산의 모습을 화동 언덕에서 바라보며 받은 인상과 감흥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도달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명품이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빗기 아직 덜 가신 산녘 물안개가 인왕을 가두는 것을 본다. 이로 말미암아 은은한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또한 주저하지 아니 하고 그어 내린 저 준법 바위벼랑을 통해 물소리와 댓바람소리가 여름한낮을 떠메고 간다. 여기서 준법은 산수화를 그릴 때 산, 바위, 흙으로 쌓아 올린 둑 등의 입체감, 양감, 질감, 명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하는 유형적인 기법을 가리키는데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법이라고 한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그리면서 준법을 원용한 것이다. 이 화법은 숨 돌릴 겨를 없이 단숨에 녹여낸 듯이 먼 산은 검정 암벽으로 가까운 산은 나무나 산수 등을 그릴 때 붓을 옆으로 뉘어서 가로로 찍는 작은 점인 미점으로 처리한다. 그 순간 검푸른 인왕의 낯빛을 에누리 없이 받아내게 된다.

두 수의 시조 ‘겸재의 물안개’에서 보듯 인왕제색도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산수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역동적인 바위벼랑과 함께 화면에서 물소리와 싱그러운 댓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겸재가 변화와 무게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편필과 묵찰법을 활용해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창안한 산수화 기법으로 완성한 인왕제색도는 수백 년이 지난 후 한 편의 시조 ‘겸재의 물안개’로 변주돼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고유의 화풍이어서 더욱 값어치가 있듯 무엇보다 고유의 시인 시조로 ‘인왕제색도’를 담백하게 노래하고 있어서 마음을 정화시킨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찾아 한동안 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역시 놀라운 그림이구나 하고 찬탄하면서 시인의‘겸재의 물안개’를 다시 읽는다. 이처럼 그림과 시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정신의 위의를 다시 한 번 깨우쳐주고 있어서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바쁜 일상을 잠시 밀쳐두고 가까운 산에 올라 여름 숲의 싱그러움을 맛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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