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76) 황룡사 구층목탑

선덕여왕이 자장의 건의로 현대 30층 건물 높이의 구층목탑 세워 삼국통일 이룩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이 구국일념에서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순수한 목재 건축물로 지었다. 현대 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건축기술이 발견되면서 놀라움을 준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해 복원한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용.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시대 건축 기술과 문화 예술적 감각을 자랑하는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목탑은 황룡사장륙존상, 진평왕 옥대와 함께 신라삼보에 손꼽힐 정도로 특별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천 년이 지나 획기적으로 발달한 현대 과학과 건축기술로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눈길을 끄는 순수 목조건축물의 기술과 탁월한 예술성을 자랑한다.

역사학자는 물론 건축기술자들의 고증을 통해 순수 목조건축물을 높이 82m, 현대 아파트 30층에 이르는 건축물을 못 하나 없이 끼워 맞추기식의 공법으로 당당하게 세웠다.

황룡사가 들어선 지역은 저수지를 메운 습지대로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건축물을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최고의 건축공법인 판축기법을 도입해 육중한 건축물이 지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

신라 도심지 가장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 설명되는 황룡사 구층목탑지에 아직도 기초석들과 가장 가운데 기둥을 받쳤던 심초석이 60여 개 기초석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

신라 제27대 선덕왕(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했다.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족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 공공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바로 대성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중국의 태화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했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과 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 구층목탑 연결부위 일부를 기술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자장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신하들과 의논했다.

신하들이 “백제로부터 공장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했다. 아비지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 용춘이 일을 주관해 소장 200명을 인솔했다. 처음 찰주를 세우는 날에 공장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구층목탑 9층 남서쪽 모서리 일부를 1238년 몽고란으로 소실된 이후 800여 년 만에 당시 크기의 규모로 재현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서라벌 도시의 경관을 영상으로 제작해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83척이다”고 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는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이른다. 신라삼보 때문에 그 모략을 중지했다. 주나라에 9정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

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설립기’에는 신라 제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이 침노했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이요, 제2층은 중화요, 제3층은 오월이요, 제4층은 탁라요, 제5층은 응유요, 제6층은 말갈이요, 제7층은 단국이요, 제8층은 여적이요, 제9층은 예맥이라고 했다.

황룡사 치미는 높이 1.8m에 이르러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치미 사면에 새겨진 조각들의 모습은 예술적 가치를 더하게 한다.
또 국사와 절의 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553년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대인 정관 645년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효소왕 즉위 7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했다. 경문왕(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

본조 광종(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로 벼락을 맞아 현종(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 또 고종(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의 병화(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륙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

연못을 메워 황룡사를 건축했지만 웅장한 건물이 지진에도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어진 고대 최고의 토목공법 판축기법인 터다지기공법의 일부를 재현한 모습.
◆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의 울음

선덕여왕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여왕은 백성들의 평화를 무엇보다 우선해 생각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심지어 왜에서까지 침략이 끊이지 않아 군사정책에 많은 고민을 했다.

선덕여왕이 즉위 10년에 접어들 때 신하들이 왕의 고민을 헤아리고는 “당나라에 유학중인 자장법사의 법력이 뛰어납니다. 황제에게 간청해 자장을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심이 가한 줄 아뢰오”라며 간청했다.

선덕여왕은 나라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헐벗음을 장구한 필설로 기록해 많은 보석들과 함께 당태종에게 보내면서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당나라의 황제는 여왕의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는 자장을 불러 크게 위로하면서 신라로 돌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을 타일렀다. 황제는 부처님의 사리 100낱을 선물하면서 “9층탑을 건설할 때 심초 석에 넣고 건축물을 세워 팔관회를 주관하며 지성으로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인근의 나라들이 항복해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에서 발굴된 금동사리함에는 탑의 조성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발굴조사에서 금동사리함을 비롯한 청동제 팔찌, 그릇, 금동불상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1978년 심초석 발굴 모습.
자장이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며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건의했다. 여왕은 크게 기뻐하며 구층 목탑을 건축할 수 있는 장인 아비지를 백제로부터 초빙해 대역사를 시작했다.

아비지가 주춧돌을 놓기 전날 백제의 궁궐이 불에 타는 꿈을 꾸고, 불안해 목탑 건축을 중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아비지의 꿈에 거대한 역사와 도사가 나타나 “이놈 이탑은 신라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왜 등의 만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건축하는 것이니 게으름을 피우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며 호통을 치고는 60여 개의 기둥을 세우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꿈에서 깬 아비지는 “이탑은 운명적으로 세워야 할 신의 탑”이라 생각하고 즉시 서둘러 목탑 건축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장륙존상과 같이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심초석이 울며 몸을 흔들어 건물 전체가 지진이 온 것처럼 흔들렸다.

경주시는 황룡사지 서쪽에 황룡사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는 역사문화관을 지어 황룡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며 새로운 역사문화콘텐츠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탑이 645년 완공된 이후 처음 흔들린 것은 647년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다. 기와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렸고, 결국 선덕여왕은 이 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다시 목탑이 흔들린 것은 당나라가 50만 수군을 동원해 신라로 진격해 올 때였다. 견훤이 서라벌로 진격해 올 때와 몽고군이 신라를 유린할 당시 1238년에는 기왓장이 떨어지고, 지붕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며 심초석이 소리 내어 울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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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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