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삼봉서원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사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 초초해 하던 중, 한주선생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이채영 선생과 마침 연락이 닿았다. 그는 필자와 고교⋅대학의 동문인데다가 좀 멀지만 일족이기도 해서 여러 가지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참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도착한 삼봉서원은 여전히 삼봉산 자락에 몸을 기댄 채 조선 말기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 가운데 한 분이었던 한주 이진상(1818~1886) 선생의 근엄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삼봉서원은 원래 한주 선생을 향사하는 서당으로 세워졌다. 한주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6년째 되던 1892년에 그의 뛰어난 제자들인 ‘주문팔현(洲門八賢; 한주선생 문하에 모인 8명의 현사(賢士)라는 뜻이다)’이 중심이 되어 서당 건립을 결의하고, 1897년에 영남 유림들이 마련한 성금으로 강당, 동·서재, 관리사 등을 준공하였다.

강당은 심원당(心源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좌우에 1칸의 방을 두고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삼았다. 대청에는 대들보에 있는 회당 장석영‘상량문’, 정면의 대계 이승희가 쓴 ‘심원당기(心源堂記)’와 면우 곽종석이 쓴 ‘삼봉서당기(三峯書堂記)’ 등 한말⋅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를 뒤흔든 쟁쟁한 학자들이 쓴 현판들이 가득하다. 순한문으로 쓰여진 현판이라 요즘의 탐방객 대부분에게는 어떤 암호처럼 보일 수도 있으므로, 현실에 맞추어 서원 측에서 간략한 해설서라도 하나 장만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봉서당에서 삼봉서원으로

삼봉산의 경사지를 단을 나누어 건물을 배치했는데, 강당의 한 단 아래에 동재인 성존실(誠存室)과 서재인 경거재(敬居齋)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강당과 마찬가지로 동재의 중앙에는 후산 허유가 지은 ‘성존실명(誠存室銘)’이, 서재의 중앙에는 교우 윤주하가 쓴 ‘경거재명(敬居齋銘)’이 걸려있어, 건물의 이름이 가진 뜻과 출입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등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삼봉서당은 창건 당초부터 곧 서원으로 승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만약 조선왕조의 수명이 조금만 길었더라면 삼봉서당은 얼마 후 틀림없이 서원으로 승격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진 가운데 한주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많은 문인⋅제자들이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고, 옥중에 갇히거나 아니면 일제의 감시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빠지게 되어 서원 승격 문제를 거론해 볼 겨를조차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서원은 봉건시대의 유물일 뿐이며, 현실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회 대중의 인식도 서원으로의 승격이 마냥 미루어지게 하는데 크게 한 몫 하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장소이건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2006년에 이남철공이 주도하여 한주선생기념사업회가 출범하면서, 서원 승격에 대한 논의가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016년에는 사당인 현도사(見道祠)를 건립하여 한주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뛰어난 제자였던 면우 곽종석(1846~1919) 선생과 아들이자 문인인 대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을 종향으로 모시게 되자, 사당, 강당, 동서재에 서고인 장판각까지 서원의 규식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삼봉서당은 삼봉서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주와 한주학파

삼봉서원에 주향으로 모셔진 한주 이진상(1818~1886) 선생은 조선 말 최고의 성리학자 가운데 한 분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성산이며,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이다. 아버지는 원호 공이며, 숙부가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 선생이다. 그의 심오하고도 독창적인 사상은 흔히 ‘심즉리설(心卽理說)’로 불리지만, 여기서 그 어렵고 딱딱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다.

다만 선생의 문인⋅제자들을 일컫는 한주학파(寒洲學派)에 대해서는 짧은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1870년대부터 경북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 남부와 산청⋅거창⋅진주 등 경남 서부 지역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한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그의 학설을 받아드려 하나의 학맥을 이루게 되었다. 그 정맥을 이어받은 8명의 현사(賢士)들이 있는데, 그들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고 한다. 후산(后山) 허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 8명의 탁월한 유학자가 바로 ‘주문팔현’이다.

이들의 사상과 저술 또한 한국유학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주학파는 국권의 박탈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여 보수유림이면서도 구미(歐美) 사회에 대해 탄력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던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1905년에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이승희⋅곽종석⋅장석영 등은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목을 벨 것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또 1919년에 많은 유림들이 동참하여 파리에 서한을 보내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곽종석을 비롯한 한주학파가 있었다. 그런데 ‘파리장서운동’은 세계 각국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보편적 질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내세워 구미 열강과 서로 도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수유림에서 흔히 따르고 있었던 자신의 한 목숨을 던져 국권 회복을 외치는 순절 투쟁이나 총칼을 들고 일제와 직접 싸우자는 의병운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방식이었다. 그만큼 국제 정세나 세계 문물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접근했던 것이다.

삼봉서원은 한주 선생이 태어나 자랐으며 학문을 익히고 가르쳤던 성주군 월항면 한개 마을에서 1㎞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1897년에 서당이 준공되자 한주 선생의 외아들이자 문인이기도 한 이승희 선생이 이곳을 지켰다. 자연히 한주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암울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올바른 학문의 쇠퇴를 안타까워하며, 울분을 터트리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주 선생의 글을 모아 1895년에 펴낸 ‘한주문집’을 둘러싸고 물의가 일어나자 삼봉서당은 1897년부터 그 일을 수습하는데 본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곽종석 선생과 이승희 선생이 중심이 되어 ‘한주문집’의 개정판을 준비한 곳도 삼봉서당이었다. 원래의 문집보다 훨씬 다듬어진 개정판은 면우와 대계 양 선생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인 1927년에 삼봉서당에서 간행되었다. 또 1907년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대계 선생이 성주군 국채보상회 회장을 맡게 되자 삼봉서당은 국채보상운동 성주 추진 본부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삼봉서당은 한주학파의 정신적 고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운동의 중심 장소 역할도 하였다.

1908년 10년 이상 삼봉서당을 지켜왔던 대계 선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해 갔다. 더 이상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은 국권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대계 선생이 떠나자 삼봉서당의 현실적인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지역의 유림들은 삼봉서당을 한주 선생에 대한 춘계 향사를 올리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한주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의 승격을 계획하고 있었던 본래의 취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례들이 쌓이고 붉은 성심이 모여 삼봉서당은 삼봉서원으로 원래의 품위를 되찾게 되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웅장한 서원 건물을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은 즐겁지 만은 않았다. 21세기에 과거의 올곧은 정신이 깃들어있는 저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일까?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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