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어린 시절, 제도권 교육이라고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님을 통해 일본어 몇 마디를 배웠다. 대부분의 단어가 신체 부위와 가족관계 혹은 생활 속 짧은 대화이거나 욕설이었다.

한글도 겨우 이름자나 쓰시던 분이였기에 일본 글자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일본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다. 공출하고 난 후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시기도 했다. 일본순사에게 쫓겨 무릎 슬개골이 이탈된 어머님의 평생 동안의 절뚝거리는 모습은 일본에 대한 분노로 자리했다. 한일전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두 주먹을 쥐고 목매어 응원했다. 승부에 패배한 날은 분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시절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은 ‘똘이 장군’이었다. 불쌍한 북한 소녀 ‘숙이’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살찐 붉은 얼굴의 수령과 ‘북한괴뢰’ 집단과 싸우는 ‘똘이’는 늘 마음 속 영웅으로 자리했다. 반공 사생대회가 열릴 때면 붉은 색깔의 악마와 돼지는 늘 공산당 무리였다.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진 흡혈귀와 다름없었다. 표어에는 누구 할 것 없이 ‘무찌르자 공산당’과 ‘때려잡자 공산당’을 물감으로 칠하면서 보지 못한 붉은 수령을 증오했다.

청소년기가 되면서 사회와 역사라는 학습과정을 통해 조금씩 어린 시절의 고정화된 사고는 변하기 시작했다. 시대와 정치의 변화 속에서 매스 미디어가 발전했다. 확장된 언론의 자유는 흑백의 단색화 된 사고에 다채로운 칼라TV의 등장처럼 다소의 유연함을 더했다. ‘국화와 칼’이란 책을 통해 일본인의 행동과 국민성을 가늠하게 됐다. 더불어 6·25라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남과 북이 갈라졌고 이데올로기적 세뇌가 괴물 모습의 북한 지배층을 만들어 내었음을 이해하게 됐다.

하지만 80년대를 지나오면서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과 또 다른 사회주의 이념이 혼재하면서 소위 ‘운동권’이라는 흐름 속에서 경직화된 사고는 기득권 세력 모두에 대한 ‘반미반파쇼’로 바뀌어져 갔다. 외세에 의한 자본 잠식과 지배를 비판하며 ‘매판자본론’을 앞세워 독재 권력과 악덕재벌을 타도의 대상으로 부르짖었다. 해방이후 차관과 원조라는 외국자본으로 이익을 선점한 관료와 기업인들이 바로 그 대상이 됐다. 연일 매캐한 최루탄을 마시며 보도블럭을 깨서 던지는 행위 하나 하나가 내 조국 내 나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여겼다. 학교 주변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뒤풀이를 할 때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또다시 애국경쟁으로 정신없는 듯하다. 친일 청산과 친북 논쟁을 앞세워 양보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2009년 친일 인명사전이 만들어지고 그에 대비되는 친북 인명사전이 2010년 시작돼 현재까지 미뤄진 상황이다. 당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명단에서 누락시킨 점을 언급하며 보수 진영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현충원 파묘와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각에 대한 현충원 안장 반대 역시 현재 진보의 거센 입장이 되고 있다. 과연 이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있는 일인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불가결한 이념 논쟁이라면 차라리 좋을 일이다. 세계적인 선진 국가에서도 이념 논쟁은 있어왔고 그것이 국가 운영의 원동력이 돼 선진 복지행정국가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미래지향적, 발전적 논쟁이 아니라 ‘소모적’ 이념논쟁과 ‘과거 청산적’ 논쟁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보수의 뿌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와 대한민국의 수립자체마저 부정하려는 시도는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친북 좌파’의 다른 이름인 ‘주사파’란 프레임 또한 이와 다름 아니다. 사회주의 이론에 물든 사람들이 북한주도의 통일을 꿈꾸고 있다는 공격으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와 보수 진영의 논리는 참으로 궁색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국민들의 확증편향을 이용해 자신들의 변하지 않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IMF라는 환란을 겪으며 외국자본의 유입과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우리는 배워왔다. 실제 외국자본 투자 비율이 OECD회원국 중에서 상위 국가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국자본에 따른 정경유착과 분배구조의 폐단은 정죄함이 마땅하나 외국자본 긍정적 효과 자체를 부인하는 오류는 있을 수 없다.

친일, 친북의 소모적 논쟁을 멈추고 미래지향적 논쟁으로 발전하길 기대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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