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77)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신라 35대 경덕왕 불교적 업적 두드러져, 불국사와 석굴암 이어 황룡사대종, 분황사약사여래불, 성덕대왕신종 주조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은 1975년 종각을 지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의 문화예술을 비롯해 정치적으로도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시기의 왕이다. 경덕왕이 불교적인 면에서 이룬 업적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흔적들도 많다. 가장 큰 불교적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들 수 있다. 또 성덕대왕신종, 황룡사종, 분황사 약사불 주조 등의 큼직한 일들이 경덕왕 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에 이르는 거대한 황룡사대종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최근까지 바다 아래서 발견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신고에 따라 문화재청이 나서 발굴 작업을 펼치기도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몽고란 때에 동해천으로 싣고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바다에 침몰되었다는 설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양북면 봉길리 마을에는 예부터 태풍에 파도가 몰아칠 때면 바다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는 구전도 신빙성 있게 들린다.

분황사 약사불 또한 거대한 크기로 조성되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봉덕사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던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곳으로 이동되면서 경주지역의 명물로 주목받다가 국보 제2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성덕왕을 기리며 왕실의 권위와 나라의 번영을 위해 조성하기 시작해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 성덕대왕신종.
◆삼국유사: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신라 제35대 경덕대왕(재위 742~765)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니, 종의 길이는 1장3촌이고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천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 이찬과 삼모부인이요, 장인은 이상택 하전이었다. 고려 숙종조(1095~1105)에 새로운 종을 만드니 길이가 6척8촌이었다.

또 이듬해 을미(755)에 분황사의 약사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6천700근이며, 장인은 본피부 강고 내말이었다.

왕은 또 황동 12만 근을 희사해 아버지 성덕왕(재위 702~737)을 위한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혜공왕(재위 765~780) 건운이 대력 경술(770) 12월에 유사에 명해 공장들을 모아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

봉덕사는 효성왕(재위 737~742)이 개원 26년 무인(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에 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이니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를 위해 시주한 쇠이므로 성덕종이라 한 것이다.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랑 김필월이 교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장황해 수록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고적보존회가 경주읍성 징례문에 달려있던 성덕대왕신종을 목봉을 이용해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옮기고 있다.
◆봉덕사와 봉덕사종

-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이다. 봉덕사는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과 효성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또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하기 시작해 효성왕 시대에 완공해 성덕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몰되어 종을 제외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는 봉덕사종은 신라 혜공왕이 주조한 종으로 구리 12만 근이 들었다. 종을 치면 소리가 100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에 침몰하자 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했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이 안치되어 있는 보광전.
-봉덕사종은 종신에 새겨진 이름에 따라 성덕대왕신종으로 불린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덕을 기리며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했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왕실에서 왕권의 권위와 존엄성을 드러내고 왕실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주조했다는 것과 경덕왕이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해석한다.

종은 771년에 완성해 봉덕사에 달았다. 조선시대 수해로 봉덕사가 수몰되자 영묘사로 옮겼다. 다시 봉황대로 옮겨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달았다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준공되면서 옮겨 관리하고 있다.

1992년 제야의 종으로 33번 타종한 뒤 중단했다가 학술조사를 위해 1996년 다시 타종하고, 2001년 10월9일, 2002년 10월3일, 2003년 10월3일 타종행사 이후 안전을 위해 타종을 완전히 중단했다.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기록된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분황사 약사여래불은 무게 30만6천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이었다는 기록이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을 고쳐짓기 위해 해체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한 기록에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다. 현재 불상은 1609년에 동 5천360근으로 조성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약사불의 왼손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갑오년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기 어렵다.

현재 보광전의 약사불은 불상의 얼굴이 둥글고 육감적이며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옷 주름 표현과 전체적인 조형기법, 보광전 보수 때 발견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 광장에 황화코스모스가 화려하게 피어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

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은 우선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봉덕사종은 황룡사종의 1/4에 불과했지만 봉덕사종 역시 황동 12만 근으로 만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종이다. 사찰의 종을 이렇게 엄청난 크기로 조성한 배경에는 왕실의 권력다툼이 숨어있다.

종을 치면서 기원하는 일은 부처 앞에서 기도로 염원하는 일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소리의 울림을 통해 세상에 전파되면서 공명하여 뜻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경덕왕은 통일신라의 최고 절정기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해 왕위세습에 대한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다.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낳는 일이 안정된 왕실을 바탕으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황룡사대종과 황룡사장륙존상, 황룡사구층목탑 등의 전설 같은 불적들이 있었던 황룡사터에 개망초가 피어있다.
경덕왕은 소원하는 바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고, 황룡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는 일이었다.

종의 규모가 클수록 소원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경덕왕은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왕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폐비되어 출궁된 삼모부인이 종을 만들기 위한 49만7천581근의 무쇠를 경덕왕에게 시주했다.

황룡사대종이 엄청난 크기로 주조돼 황룡사에 걸리자 귀족들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폐위된 삼모부인의 시기하는 마음이 후비로 들어온 만월부인의 태기를 가로막아 왕자를 보기 어렵게 할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암중세력다툼으로 번졌다.

급기야 만월부인은 아들이 생기지 않자 경덕왕에게 부탁해 최고의 장인을 불러 신종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의 덕을 기리고 백성들의 안녕과 나라의 홍복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봉덕사를 짓고, 봉덕사종을 주조하도록 명했다.

황룡사지 광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회랑같은 터를 지나 황룡사의 역사문화를 소개하는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보인다.
봉덕사종의 주조가 늦어지자 만월부인은 경덕왕을 통해 황룡사대종 타종을 금지토록 했다. 경덕왕은 “황룡사대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전쟁에 나아갈 때와 정월초하루 제례 외에는 타종을 금하라”며 엄명을 내렸다.

황룡사대종을 타종하고 전쟁에 나아가면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서도 군사들이 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몽고 군사들은 신라의 국경을 넘어서면서 첩자를 보내 황룡사대종의 목어를 숨겨버렸다. 황룡사대종 타종을 못하고 몽고전에 출전한 신라 군사들은 맥없이 쓰러지고, 결국 황룡사까지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황룡사대종의 신비한 힘을 믿은 몽고군은 배를 이용해 대종천으로 종을 실어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에 가라앉아버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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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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