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이 양지를 시켜 영묘사에 장륙존상을 세우다
유명사찰이었던 만큼 전하는 설화도 다양하다.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가 심화로 절을 태워버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영묘사에는 신라시대 승려이자 조각가요 도술가, 예술인으로 전해지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여럿이다. 향가로 전하는 영묘사의 장륙존상과 목탑,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의 글씨도 양지 스님의 솜씨다.
영묘사는 기록으로도 전하는 것처럼 유명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절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다. 흥륜사지로 전해지면서 사적 제15호로 지정했지만 이곳에서 영묘사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발굴된 얼굴무늬수막새는 2018년 11월27일 대한민국 보물 제2010호로 지정됐다.
선덕왕(재위 632~647)이 절을 짓고 소상을 만든 인연은 모두 ‘양지 법사전’에 실려 있다.
경덕왕(재위 742~765) 즉위 23년(764)에 장륙존상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비용이 조 2만3천700석이 들었다.
양지전에서는 불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하였다. 지금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둔다.
영묘사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시 635년에 창건된 규모 있는 사찰이다. 영묘사에는 당시 최고의 장인으로 전해지고 있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많다. 양지 스님은 영묘사 전탑의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도 직접 썼다고 전한다.
특히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든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장륙존상은 흙으로 빚었는데 이때 도성의 백성들이 흙을 나르며 부른 향가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더럽도다 이 몸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는 풍요다.
장륙존상은 경덕왕 때 금으로 칠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묘사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있다. 경주 송화산 기슭 서천변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는 설과 부 서쪽 5리에 있다는 기록, 동천동에 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1976년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 흥륜사지 발굴에서 ‘대령묘사조와’라는 기와편이 발견된데 이어 지속적으로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현재의 흥륜사지가 영묘사지라고 결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발굴조사에서 명문기와편과 금당지, 목탑지, 기단유구, 동서회랑지 등이 발견되면서 영묘사는 삼국시대에 이미 창건되어 선덕여왕과 통일신라 이후에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묘사는 조선 중종 재위기인 1515년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선덕여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받았다. 여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 활리역의 지귀라는 젊은이도 사람들 틈에서 여왕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선덕여왕을 부르다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의 행차에 지귀가 백성들 틈에 나타났다. 지귀가 선덕여왕을 부르며 뛰어가자 관리들이 그를 잡았다. 이 소란을 지켜본 선덕여왕이 관리에게 연유를 물었다.
지귀가 여왕을 사모하여 미쳐 쫓아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은 관리에게 지귀가 자신을 따라오게 하라고 전했다. 지귀는 기뻐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을 따라갔다. 여왕은 영묘사 법당에서 불공을 드렸다.
지귀가 잠에서 깨어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그 기쁨은 불씨가 되어 지귀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라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불은 지귀가 잡고 있던 목탑에 옮겨 붙어 순식간에 탑을 태웠다. 지귀는 온 몸에 불이 활활 일어나는 불귀신이 되었다.
여왕은 술사에게 명하여 지귀의 불에서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을 짓게 해 백성들에게 돌렸다. 이때부터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이 생겨났다.
선덕여왕이 도깨비들에게 명하여 연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립했다. 이 때문에 연못에 살며 도를 닦던 이무기가 승천의 기회를 놓쳐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에게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그 이무기는 이미 상당한 도력을 지녀 사람으로도 변신하는 재주를 가졌다. 이무기는 영묘사 불목하니 지귀로 변신해 영묘사의 온갖 일에 간섭하며 방해했다.
지귀는 노골적으로 부처의 권한을 가로채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영묘사의 기도효험이 높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을 모시는 법사의 도력이 높아 이무기의 장난을 알아채고 여왕에게 이를 아뢰었다.
선덕여왕은 법사의 방침에 따라 양지에게 장륙존상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양지 스님도 법력은 이무기의 재주에 못지않았다.
이를 지켜본 양지가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나타나는 이무기의 목을 잡고 물었다. “네 녀석이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국사로 진행하는 불사를 함부로 망치는 일은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어르고는 “네 사정을 알고 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합당한 보상을 할 테니 말하라”고 타일렀다.
지귀로 변한 이무기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선덕여왕이 나를 망치게 했으니 선덕여왕과 혼인하게 해 달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양지는 “여왕은 나라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로운 개인과 혼인할 수 없다. 네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면 죽여 후환을 없애겠다”고 으르자 지귀가 납작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지귀는 빌면서 “그렇다면 여왕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제게 주신다면 가슴에 품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살겠다”고 말했다.
양지는 장륙존상을 완성한 다음날 여왕이 장륙존상에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금팔찌를 얻어, 불씨를 주술로 심은 뒤 지귀의 가슴에 얹어 주었다. 지귀는 여왕의 팔찌를 보고 기쁨에 겨워 가슴 깊숙이 간직했다. 그러나 그 금팔찌가 자신을 태워 죽이는 불씨라는 것을 지귀는 꿈에도 몰랐다.
선덕여왕이 왕궁으로 돌아간 뒤 지귀는 불귀신이 되어 목탑을 태우고 금당으로 뛰어들었지만 장륙존상이 뿜어내는 불력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지귀는 한 줌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