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에 반발하는 의사 관련단체의 실력행사가 민감한 현안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다. 전국의사 총파업, 전공의 총파업, 의사 국가시험 응시 거부 등으로 의료계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임해 전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의료인들이 인술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때 아닌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전후 사정을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독신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합계출산율마저 2.0 이하로 떨어져 대학입시대상자가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 이러한 부정적 추세가 개선될 여지는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오래 전에 세운 계획에 맞춰 의대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려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구 1천 명 당 OECD 평균 의사 수가 적다는 이유는 설득력이 없다. 젊은 의사 비율과 인구대비 의사증가율은 OECD 평균보다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래 추세를 수정해가는 것이 정상이다. 또 의료보험을 비롯한 의료시스템의 국가별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의료의 질도 당연히 따져볼 일이다. 의사 부족과 의대 정원 조정은 그 연후에 도출되는 결과물이 돼야 한다.

공공의대 설립 목적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지역별 전공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시도된 것 같다. 하지만 의사 관련 단체들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세게 반발한다면 확정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재검토해보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윈·윈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전향적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국민을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한다면 바꾸지 못할 정책이 없다. 급변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변하지 않는 환경은 없고 영구불변의 진리는 없다.

의사 수의 지역별 불균형은 다른 방법으로 조정해야할 과제이다. 예컨대 농어촌 등 무의촌 주민이 인근 거점도시 의료서비스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이 현실성 있고 경제적인 방법일 수 있다. 의사의 환자 접근성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기 어렵다면 환자의 의사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성도 크다. 굳이 가지 않으려는 의사 가족을 억지로 벽지로 보내려고 강요하는 것보다 환자가 쉽게 의사를 찾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 더하기가 안 되면 빼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전공별 불균형은 의료수가 조정이나 지원금 등을 활용하는 방법이 합리적이다. 자본주의와 자유경쟁 하에서 어떤 영역이라도 난이도와 보상에 따라 명암이 갈리기 마련이다. 누구나 위험과 수고에 비해 보상이 더 큰 일을 선호한다. 의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 흉부외과 등이 의대생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는 희생에 비해 소득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시정해야 할 필연성이 정의라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시장실패에 정부가 적극 개입할 정당성이 확보된다. 의료보험수가를 조정하거나 정부가 직접 지원금을 주는 방법을 상정할 수 있다. 미곡의 수매량과 수매가를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존 의대를 활용해 공공의대 설립 목적을 점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도 하나의 선택지다. 남원이나 순천에 새로이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것보다 전북대 의대나 전남대 의대의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이 반발이 적고 더 효과적이다. 지역발전에 더 실속 있고 지속 가능한 방안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생색내기 위해 기획된 조잡한 정책이 아닌지, 특정지역의 지역공약사업에 무리한 모험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의심스럽다. 실패한 의학전문대학원 모델이라는 점도 께름칙하다.

의료인들의 전폭적인 참여가 절실한 때에 그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법안을 꼭 이 시점에 발의한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의료계가 거세게 반발할 거란 사실을 몰랐다면 정말 무능한 것이고, 그걸 알고도 이런 일을 벌였다면 위중한 재난을 틈타 중대한 정책을 슬쩍 도둑질하려 했다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데모 현장에서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의 습성을 지배세력이 된 지금에도 버리지 못하고 적과 싸우듯이 국민을 이기려고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클리셰다. 정권에 해악을 미치는 이슈를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 덮으려는, 여론조작을 위한 이이제이적 충격전술이라면 이는 망국적인 최악의 선전선동에 다름 아니다. 이 상황에서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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