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강산 사면불, 문경 대승사 사면불, 당나라 황제를 감탄케 한 만불산
또 당나라 황제를 감탄하게 한 만불산을 조각한 신라의 불심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감각과 과학적 기술력은 수십 세기를 훌쩍 뛰어 넘어도 신비롭고 감탄스럽다. 이는 신라의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삼국유사가 의도한 제작의 목적을 보는 듯하다.
문경 대승사의 사불산 사불암, 경주 금강산 백률사의 굴불암, 그리고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만불산의 흔적을 더듬어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소개한다.
죽령의 동쪽 100리쯤에 우뚝 높이 선 산이 있다. 진평왕 9년 갑진년이었다. 4면이 널찍하고 사방여래를 새긴 큰 바위 하나가 갑자기 하늘에서 그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모두 붉은 실로 감싸 있었다.
왕이 이를 듣고 가마를 타고 가서 우러러 경배하고, 바위 옆에 절을 지었다. 이름은 대승사이다. 비구승 망명을 불러다 연경을 외게 하고 절을 주관하되 돌을 깨끗이 하고 향불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부르기를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했다.
비구승이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고 나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올랐다.
또 경덕왕이 백률사에 갔을 때였다. 산 아래 이르자 땅 속에서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보게 했더니 큰 돌이 나왔는데 4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지어 굴불사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은 잘못 불러 굴석이라 한다.
산에는 깎아지른 바위와 기이한 돌 그리고 물이 솟아나는 구멍을 띄엄띄엄 만들었다. 한 구획마다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여러 나라 산천의 모습과 산들바람이 집안으로 들어가고 벌 나비가 날아다니며 제비와 참새가 춤추는 모습이 은은히 숨어 보이는데 실제인지 만든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 1만 개의 불상을 모셨다. 큰 것은 1촌이고 작은 것은 8~9분쯤 되었다. 그 머리는 큰 기장 알만한 것, 콩 반쪽만한 것도 있고, 골뱅이처럼 틀어 올린 머리카락 모양과 두 눈썹 사이의 백호, 눈썹과 눈까지 또렷했다. 모두 갖추어진 모습을 비슷하게는 설명하겠지만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만불산이라고 했다.
앞에는 비구상 1천여 개를 돌아다니듯 만들고, 아래에는 자줏빛 금종 세틀을 늘어놓았는데 모두 종각과 좌대가 갖추어졌다. 고래 모양으로 쇠 부채를 만들어 놓고, 바람이 불어 종이 울리면 돌아다니던 승려들이 모두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는 것 같았다. 은은히 염불소리가 들리니 이는 종에서 나는 것이었다. 비록 만불이라 부르기는 하나 그 실제를 다 적을 수 없다.
다 만들어지자 사신을 보내 바쳤다. 대종은 이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신라 사람들의 재주는 하늘이 만든 것이로군. 사람의 솜씨가 아니야.”
이에 구광선으로 바위 사이에 덮어두니 이 때문에 불광이라 불렀다. 4월8일에 두 거리의 승려들을 내도량으로 불러 만불산에 예배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삼장 불공에게 밀교의 경전을 천 번 되풀이 염송하며 경하하도록 했다. 보는 이마다 모두 그 솜씨에 탄복했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34대 효성왕의 동생이다. 경덕왕은 742년에 즉위해 765년까지 23년간 왕위에 있었다. 이때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안정적이고 힘이 팽창했던 시기다. 문화 예술적으로도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때로 드러난다.
경덕왕은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안정적인 나라로 운영하기 위해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랑주를 양주로 고치는 등 지명을 고치고, 제도를 개편하는 한편 관직의 명칭도 대거 바꾸었다.
또 경덕왕은 불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불국사와 석굴암, 굴석사와 대승사 등의 많은 불사를 진행하며 표훈대사 등의 승려들에 대한 대우를 특별히 높였다. 특히 불사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기 위한 애착 때문이었다.
표훈대사는 당시 불국사에 머물러 있었다. 표훈대사의 법력은 이미 일반성인의 수준을 넘어 하늘을 오가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경덕왕의 부탁은 표훈대사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표훈은 경덕왕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굴불사 부처에게 일을 의뢰하기로 하고 행장을 꾸려 굴불사로 향했다. 굴불사의 사면불에는 아홉 부처가 모두 특별한 능력을 자랑하며 각자 동서남북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
표훈은 이미 아홉 부처 중 상제와 잘 통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부처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경덕왕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서쪽의 아미타 삼존불이었다.
표훈은 굴불사의 사방불 앞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한 거대한 상을 차렸다. 불상 주변에 팔색의 화려한 비단을 두르고, 매 끼마다 온갖 산해진미로 산처럼 먹을 것을 쌓아 정성을 드렸다. 매일 새벽 몸을 정갈하게 하고 사방불의 서쪽에서 아미타삼존불을 마주하고 앉아 기도를 드렸다.
그의 깊은 정성에 삼존불은 21일 만에 감응해 표훈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당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삼존불의 물음에 표훈은 “천년 사직을 이을 기둥을 얻고자 하옵니다”며 간절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삼존불은 각자 “우리가 아들딸을 점지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경영할 재목은 하늘의 뜻이니 천제께 부탁을 드려야 한다”며 일의 중대함을 이야기 하고 천제가 아끼는 우협시보살이 일을 맡기로 했다.
이에 표훈이 경덕왕의 완고한 의지를 전하자 좌협시보살이 담당하기로 하고 사방불에서 몸을 날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제의 고집도 좀체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미타삼존불과의 두터운 친분 때문에 천제도 어쩌지 못하고, 우협시보살의 얼굴을 닮은 아들을 약속했다.
자신의 의지를 꺾게 한 경덕왕의 고집에 천제는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천년 신라의 사직을 기울게 하는 역사를 써버렸다.
하늘에 빌어 아들을 얻은 경덕왕은 기쁨에 겨워 표훈대사에게 크게 감사하며 불국사에 만결의 토지를 희사했다. 이어 온 나라에 축복하는 분위기를 담아 1년간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케 했다.
그러나 재앙의 씨앗은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경덕왕의 심부름을 했던 사방불의 좌우 협시보살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굴불암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별개의 조각으로 떨어진 채 서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었지만 7년 만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아들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36대 혜공왕이 되었지만 숙부 언승과 김경신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본격적인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이 시작되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