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담고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월 조임의 손자인 조시벽이 1710년 건립했으며 조선 후기 학자인 하담 조언관이 태어난 곳이다. 고택은 ㅁ자형 건물로 정면 좌측에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높게 솟아있고 그 뒤편에 안채가 있다. 김진홍 기자.
▲ 하담고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월 조임의 손자인 조시벽이 1710년 건립했으며 조선 후기 학자인 하담 조언관이 태어난 곳이다. 고택은 ㅁ자형 건물로 정면 좌측에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높게 솟아있고 그 뒤편에 안채가 있다. 김진홍 기자.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스크 탓인지 이웃 간 대화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 한 마디도 건네기도 쉽지 않다.

행여나 엘리베이터 등에서 자칫 헛기침이라도 내밷게 되면 괜스레 동승자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쩌면 우린 먼 훗날 후손들에게 코로나19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주인공 선조들로 기억될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경북 영양 ‘하담고택’을 찾아 나섰다.

영양은 태백과 소백을 따라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를 끼고 있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고장이다.

경북에서도 최오지에 속한 까닭에 청정한 산과 계곡에다 옛 정취를 머금은 정자와 고택이 즐비하다. 조선시대의 문학과 풍류를 즐기며 격조 높은 문화를 누렸던 선비 정신이 깃든 고장이다.

영양에는 웅장한 아흔아홉칸 집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저 살림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소박한 건물로 보통 열 칸 미만이다.

그래서 영양 지방에 사는 선비의 삶을 ‘초가삼간’ 문화라고도 한다. 초가삼간에도 만족을 느끼면서 생활하는 선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고택 사랑채의 행서체로 된 ‘하담고택’ 편액
▲ 고택 사랑채의 행서체로 된 ‘하담고택’ 편액
◆하담 고택(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

‘하담고택’은 영양군 영양읍 삼지리 315-1번지에 있다. 영양읍에서 서쪽으로 난 마을길인 삼지길을 따라가면 가옥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남서향로 자리잡은 고택은 사면에 한식기와를 올린 낮고 두터운 토석담장을 둘렀다. 대문 앞쪽과 좌측에는 마을길이 지나고 있으며 우측에는 이웃집이 자리하고 있다. 낮은 담장은 이웃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담장을 높이쌓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다.

뒤뜰에 깔린 녹색 잔디와 푸른 하는 사이에 높인 고택은 고풍스런 멋을 풍긴다.

하담고택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조언관의 호(하담)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2003년 4월17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로 지정됐다.

조언관(1805~1870)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큰아버지인 조홍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당대 글이 밝기로 소문났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먹고 살기 어려워 마을 주민들이 죽어나가자 직접 다니면서 시체를 치우는 등 봉사를 많이 해서 칭송이 자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언관은 봉사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하담고택에서 북쪽 1시 방향에 있는 하담정에서 선비를 양성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 같은 조언관의 선행은 어쩌면 선조들로부터 대물림해 온 것일법 하다.

하담고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지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월 조임(1573~1644)의 손자인 조시벽(1670~1753)이 1710년 경에 건립했다.

조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2번에 걸쳐 군자금으로 써달라고 전재산을 내놓고 ‘홍의장군’ 곽재우의 지휘 하에 의병에 참여하는 등 누구보다 애국심이 컸다.

하담고택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언뜻 사월 조임, 하담 조언관 등이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으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ㅁ자형 건물로 된 고택의 정면. 사진 왼쪽으로 출입문이 보인다.
▲ ㅁ자형 건물로 된 고택의 정면. 사진 왼쪽으로 출입문이 보인다.
◆소박함이 담겨있는 구조

하담고택은 ‘ㅡ’자형 안채와 ‘ㄷ’자형 사랑채가 맞물려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조선중기 전형적인 사대부의 살림집 형태이지만 소박함이 담겨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측에 툇마루가 있는 1간 규모의 온돌방과 1.5간 규모의 온돌방과 정지간이 있다.

대청의 서측에도 전면 툇마루가 있는 1간 규모의 온돌방이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 구조이고 전면으로 열려 있으며 배면에는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대청쪽으로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동측 방 쪽에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통하도록 했다.

대청 서측의 1.5칸 방은 전면과 배면에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정지와 고방 쪽으로 각각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외부와 통하도록 했다.

최근 집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거주할 수 있도록 현대식으로 살짝 보완했다. 배면 기단 위에 샌드위치 패널로 보일러실을 꾸미고 외부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

사랑채의 기단은 자연석 주초를 놓고 누하주를 세워 상부 툇마루와 기둥을 받도록 했다.

하담고택의 기둥은 모두 사각기둥으로 돼 있다. 기둥상부는 납도리 형식으로 짜 맞춤을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으로 끝을 와구토로 마감했다.



▲ 하담고택 사랑채.
▲ 하담고택 사랑채.


대문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사랑채 마루에는 ‘荷潭古宅(하담고택)’ 편액이 멋진 글씨체를 뽐낸다. 안채 마루간에도 ‘三巖軒(삼암헌)’ 편액을 걸어 두었다.

사랑채는 전퇴 형식으로 대문간을 중심으로 동측에 1간 규모의 온돌방과 2간 규모의 광이 있다. 광 배면에 2간 규모의 곡간이 있다.

대문간 서측에는 1간 규모의 사랑방 두 개와 1간 규모의 사랑마루간이 있다. 사랑마루에 면한 사랑방은 배면에 반침을 달아 벽장을 꾸며 놓았다.

사랑채의 두 방은 전면 각 칸에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마루간으로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마루간의 삼면은 두 짝 여닫이 띠살청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

사랑마루에 면한 사랑방은 배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아 윗간과 통하도록 했다. 윗간 방은 좌우측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외부와 통하도록 했다.

대문간의 동측 온돌방은 전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측면으로 외여닫이문을 내어 광으로 통하도록 했다. 광의 북측에 있는 2간 규모의 곳간채는 안마당 쪽에 두 짝 널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다.



▲ 하담고택의 고인돌 3개 중 출입구에 있는 고인돌.
▲ 하담고택의 고인돌 3개 중 출입구에 있는 고인돌.


◆고인돌 이야기

하담고택에는 고인돌이 있다. 남방식 형태로 구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고인돌이 3개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담고택은 ‘삼암헌’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인돌에 얽힌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인돌에는 구멍들이 뚫려져 있다. 이것은 별자리를 의미하고 기록하기 위해 표시해 놨다는 것.

실제로 영양지역은 밤하늘 투명도가 뛰어나 은하수, 유성 등 하늘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육안관측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산’과 관계가 있다. 고인돌에는 달걀 반 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성혈이 있다.

선사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신앙의식은 생존을 위한 기원(祈願)으로 신변 안전이나 식량 확보를 위한 개체보존과 종족을 이어가기 위한 종족보존이 주된 형태다.

하담고택의 성혈은 대(代)를 이어나갈 수 있게 자식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전해지고 있다.



▲ 고택 사랑채 앞 연못과 그 뒤로 보이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 고택 사랑채 앞 연못과 그 뒤로 보이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대를 이어온 고택 가꾸기

마당에는 수백 년을 살아온 회화나무(홰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홰나무는 학자수, 출세수, 행복수, 양반수로도 불린다.

고택이나 관청 앞에서 서 있는 고목을 보면 어쩐지 선비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홰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도 알려졌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고, 서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홰나무를 심어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향나무는 ‘믿음’을 상징한다. 믿음을 갖고 우애하며 살아가자는 뜻이 담겼다.

하담고택에 버티고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조시벽의 아들인 농수 조백규(1697~1762)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잡귀를 물리치는 홰나무 덕분이었을까. 하담고택에 살았던 조시벽부터 조백규, 조호신, 조언관 등 모두 장수했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았다. 돌담에 대문이 없었던 것도 언제든지 이웃과 소통하고 도우기 위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마당에는 연못도 있다. 하담 조언관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조그마한 연못에는 아직도 연꽃이 피고 물고기도 살고 있다.

현재는 후손인 조국영(79)·심용진(72)씨 부부가 정성스럽게 고택을 가꾸고 있다. 비록 타 지역에 살고 있지만 1~2개월에 한 번씩 고택을 방문해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이들 부부는 이곳에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매난국죽(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을 비롯해 라일락, 배롱나무 등 50여 종류의 식물을 심었다.

하담고택은 영양의 숨은 명소다. 영양 고추연 테마공원에 인접해 있어 전국에서 하담고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자 찾는 방문객이 늘고 있다.

하담고택에서 대대로 이어져 온 선조들의 따뜻한 이야기는 어쩌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고 실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려울 때 일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아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진다면 코로나19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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