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개 사과

발행일 2020-09-13 15:08:1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분홍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 아래 정겹게 하늘거린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다. 가을이 피부로 느껴진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도 이 가을 정취를 실감할까. 어찌 지낼까.

지난 일을 떠올리며 시골로 향했다. 텃밭에 심어뒀던 채소도 과일도 거두지를 못했다. 예쁜 꽃이 펴 알알이 달렸을 사과나무도 코로나로 인해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사과나무로 달려가니 보조개가 가득하다. 군데군데 패이고 들어간 흠이 보인다. 옴폭옴폭 찍혀있는 사과의 뺨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홀로 견디며 힘들었을 과실들이 살갑게 다가온다.

언젠가 경북에 엄청난 우박이 쏟아진 적이 있다. 한창 수확할 시기에 주먹 덩이만 한 우박이 내렸으니 많은 사과가 상처를 입었다. 맛과는 별도로 상품 가치가 떨어져 버렸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고생했던 농민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우박에 맞아 푹 파인 사과가 마치 웃는 것 같아요.”

푹 들어간 부분이 웃는 보조개처럼 보였다. 농민들은 희망을 품고 이름을 붙였다. ‘하늘이 만든 보조개 사과’라고. 보조개 사과는 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었다. 그래 나의 사과도 힘든 고비를 기억하며 웃고 있다. 보조개를 머금고.

잠시 보조개 사과에 눈을 주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보호자의 민원이라고 한다.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보호자로 온 아빠는 격리돼 생활해야 하는 상황을 참는 데 한계치에 도달한 모양이다. 얼른 옷을 입고 회진하러 들어서니 아빠가 나를 보자 갑자기 두려움을 호소한다. 확진자와 함께 있는 좁은 공간에 있으니 곧 병이 옮아 올 것 같단다. 식사 때 마스크를 벗어야 하고 또 가까이서 24시간 간호를 해야 하니 너무 겁이 난다는 것이다. 잠잘 때만이라도 독립된 방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환자들로 가득한 병동이라서 가능하지 않다고 하자 이젠 목소리를 높인다. 흥분된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빠의 코로나 공포감이 너무 커서 일단은 분리가 필요했다. 병에 걸릴까 봐 걱정인 데다가 확진돼 또 일을 못 하게 되면 먹고사는 것이 문제라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한다.

어쩌면 좋을까.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빠가 힘들어하니 자기 혼자서 병실에 있을 수 있다고 얼른 대답한다. 이전에도 전화 통화해가면서 혼자 있은 적도 있다며 자신 있는 표정이다. 할 수 없이 아빠를 집으로 보내 자가 격리하도록 하고 아이는 혼자 입원 생활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하지 않으랴.

코로나가 오래 가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그로 인한 마음 상함이 불쑥불쑥 드러난다. 아이 대신 아파지고 싶다며 울던 엄마의 마음도, 내가 건강해야 우리집을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던 아빠의 마음도 다 이해가 된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이 모든 것이 코로나라는 요망스러운 바이러스가 일으킨 것인걸.

가을이 되자 다행인 것은 선선한 바람결에 혼사 소식이 날아든다. 봄의 결혼식을 가을로 미뤄 두지 않았겠는가. 주말이면 연이은 결혼식 스케줄로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지만, 코로나로 힘들었을 이들, 그래도 결혼식을 올릴 수는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발 이 코로나가 잦아들어 앞으로 신혼 생활에 핑크빛 행복만 가득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코로나19 치료에 투입돼 병동에서 봄과 여름을 보내었던 동료 과장이 둘이나 노총각 딱지를 떼게 됐다. 언제 국수 먹여줄 것이냐고, 봉투 준비해뒀는데 그 봉투가 낡아서 이젠 없어질 것 같다는 농담도 주고받기도 했는데 드디어 축의금 봉투를 쓸 수 있고 한껏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흐뭇하다. 새 출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행복으로 바꾸어 생각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별 사건 때문에 눈물지을 때가 많지 않던가. 순간순간 서글픈 마음이 들 때도 밝은 면, 좋은 면, 행복을 미리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긍정의 순간을 기대해야 하리라.

이번 가을에는 어떤 경우에도 꼭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박에 맞아 아예 상품 가치가 없었던 그 사과가, ‘보조개 사과’로 바뀌면서 인기가 좋았던 것처럼. 사람들과 만나지 못해 어렵더라도 양 볼에 보조개를 지어가며 ‘인생이 별것이야, 까짓 거’ 하는 심정으로 좀 더 가볍고 향기 나게 하루를 맞으면 좋겠다.

가을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구름 위에 빛나는 태양이 있음을 기억하며 씩씩한 걸음을 내딛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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