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는 무죄다

발행일 2020-09-15 14:19:06 댓글 1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서울 집값이 오르자 느닷없이 전세가 유탄을 맞았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이른바 ‘갭 투자’ 때문이다. 갭 투자 시 전세보증금이 통제 불가능한 담보대출로 작용해 주택가수요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전세 자체를 죄인으로 몰아 없애자는 것은 빈대 잡으러 초가삼간을 태우는 어리석음이다. 집값이 오르면 주택공급을 늘릴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정도다. 주택수요를 억누르려는 정책은 자연스런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정책이 성공하기도 어렵다.

정부는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 투기세력을 강압적으로 때려잡아 주택수요를 억제해보려고 기를 쓴다. 투기꾼의 탐욕과 이기심이 밉고, 집 없는 사람의 발끈 달아오르는 조급한 성미가 천박하게 비칠 법하다. 그래서 천박하고 미운 사람들의 팔다리를 묶어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게 손쉽고 돈도 들지 않는데다 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딱 좋다. 무소불위의 칼자루를 휘두르는 맛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토지거래제한구역을 지정하고 투기과열지구를 발표한다. 금융권의 각종 대출을 옥죄고 자금을 추적한다.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관련 세금을 감정적으로 비칠 만큼 대폭 인상한다. 불평불만이 비등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말을 듣지 않고 과욕을 부리는 사람들의 자승자박이고 인과응보라고 눈을 흘긴다.

지금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착한 사람들이니 본능에 충실한 찌질이들의 심정을 알 리 없다. 고시에 합격한 보상으로 명문가와 혼인해 신혼부터 넉넉하게 출발한 엘리트들도 서민의 삶을 알기 힘들 것이다. 월세와 전세의 차이를 경험 속에서 실감할 기회가 없었을 터다. 월세가 전세보다 낫다거나 전세는 없어져야 할 관습이라는 생각은 꿈속의 뽀얀 민낯을 잘 보여준다. 공중에 붕 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봐야 탁상공론만 있을 뿐 제대로 맥을 짚은 정책이 나올 수 없다.

전세는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가 윈·윈 하는 제도다. 집주인은 집을 처분하지 않고 세입자에게 안심하고 관리를 맡긴다. 금융권 대출을 얻지 않고 이자 부담 없이 절반 정도의 자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착한 제도다. 무이자 민간자금을 활용해 레버리지를 기대하는 이점도 있다. 지금은 갭 투자가 사회적으로 눈총 받는 진상이지만 집값 하락기에는 착한 브레이크 역할도 한다. 갭 투자는 소수의 위험감수형 투자에 해당할 뿐 비난대상인 것은 아니다. 소비자 중에도 ‘어얼리 버드’가 있듯이 투자자 중에도 공격적인 투자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세입자도 월세보다 전세를 선호한다. 매월 집세를 납부해야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전세환산가치와 비교해 저렴하다하더라도 월세는 간당간당하다. 월세를 내지 못하면 당장 거리로 쫓겨날 수 있다는 심리적 부담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밖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더라도 집에 오면 아늑하고 편안해야 하는 법이다. 월세는 그런 안락함이 부족하다. 전세는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목돈을 맡겨두고 집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다. 설혹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도 전세금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에 다소 느긋하다. 전세금은 큰 목돈이기 때문에 그 돈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지 않는 한,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장치로 작용한다. 집을 임차하는 대가로 집주인에게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입자는 전주의 지위를 아울러 갖는 측면도 있다. 절대적 을은 아닌 셈이다. 전세자금 대출까지 저리로 이용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전세는 세입자에게 나쁘지 않다. 집을 살 돈을 비축하는 중간단계로 유용하다.

전세가 투기에 악용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관습’이나 ‘없애야 할 제도’라는 시각은 편견이다.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투자하려는 사람들은 대출규제로 막을 수 있지만 전세를 안고 집을 사려는 사람은 통제할 방안이 없다.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는 점이 전세의 죄 아닌 죄다. 그 때문에 미운털이 박히고 급기야 전세를 없애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전세의 역기능만 볼 게 아니라 그 순기능을 잘 이해해야만 좀 더 현명한 정책방향을 잡는다. 전세의 특성은 시장의 힘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영역을 지켜준다. 월세에 살면서 돈을 모아 전세로 갈아타고, 좀 더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이 평범한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사다리다. 공연히 남의 사다리를 걷어차선 안 된다. 월세든지 전세든지, 누구나 자신의 형편에 맞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그에 합당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전세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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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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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noo*****2020-09-15 15:07:09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대부분의 서민들이 더 살기가 팍팍해졌네요.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는지~~ 걱정입니다. 우리 아이들 세대가 더 걱정이고~~ 좋을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