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염귀순 ‘손이 말하다’

발행일 2020-09-22 14:07:1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은상 수상자 염귀순
손은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다. 숨길 수 없는 온도를 담아 타자와 교감하고 세상과 교류한다. 손을 잡고 놓고 오므리고 펴고 엎는다. 악수는 우호의 표시이고 박수는 환영과 응원, 찬사를 표하는 것이며 ‘손에 손잡고’는 마음과 힘을 합한다는 뜻이다. 세상 밖 어떤 힘이 간절할 적에는 두 손부터 모은다. 조용히 합장하고 비손하는 자세엔 신에게로 향한 혼신의 염원이 담겨있다.

호미곶 ‘상생의 손’은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 모든 국민이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의미를 담았다. 동해안 해돋이 명소와 ‘손’, 생각해 보니 썩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청동상(靑銅像)의 손이 하나가 아니다. 육지의 해맞이광장엔 왼손이, 바다엔 오른손이, 그리 멀지 않은 사이를 두고 마주 보며 있다. 그리움은 저 두 손의 거리 안에 있는 것인지. 손바닥에 인생의 골목길 같은 손금이 선명하게 드러난 손 모양에 놀라면서도 친근감이 와 닿는다. 우리는 삶이라는 거친 바다를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손과 손이 맞닿으면서 삶의 용기, 감동, 풍요가 더해지는 것이 인생길인 만큼 눈앞의 손이 왠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손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손이 되었다’고, ‘손에 대한 묵상’에서 정호승 시인이 말했다. 손은 감성적이다. 손을 잡고 보면 체온이 통하고 끈끈한 무엇이 흐르고 마음 문이 스르르 열린다. 힘든 세상 고독한 관계에서 단절의 아픔을 딛고 사람들과 소통하고픈 누군가의 꿈이, 통신망을 발달시키고 우리에게 스마트폰의 세계를 열어주었을 테다. 그렇다고 심층의 외로움까지야….

가끔은 세상살이가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간다. 난데없는 ‘비대면’ 시대를 맞아 일상이 휑해졌다. 사람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 가급적 사람끼리 손잡지 말기를 권장 받는 상황이 하룻길 여행을 부추겼다 할까. 마스크로 무장하고 막연함과 홀가분함으로 한반도의 최동단 호미곶을 찾아왔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객기가 보태어졌는가, 알려진 동해안 풍광 말고도 몰랐던 역사 이야기까지 펼친다.

역사의 진실은 이따금 아프다. 하지만 되돌아보고 새겨야 한다고 바다에 불쑥 솟아있는 손이 말하는 것 같다.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호미곶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했다. 육당 최남선은 일출제일의 호미곶을 조선 10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으로 묘사하고,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했으니, 일제는 이곳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하였다. 거기에다 한반도를 연약한 토끼에 비유하며 호미곶을 토끼 꼬리로 비하해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후 세대인 내가 여중에 다니던 시절 지리 과목 시간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호미곶을 토끼 꼬리를 닮았다고 외운 기억이 난다. 새삼 알았지만 굴곡의 역사는 질기도록 사람의 머리 한구석을 지배하기도 한다.

오늘따라 호미곶의 바다는 잔잔한 남색 평원이다. 세상을 더 많이 더 깊이 읽는 중인지 이따금 몸을 뒤척일 뿐 고요하다. 뭍에서 바다 위로 이어진 ‘해파랑길’로 들어서니 하늘과 바다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평선이 파도도 없이 가물거린다. 한여름 외딴곳임에도 마스크를 쓴 여행객들에게 막 생성된 청정한 바람이 호의를 베풀어준다. 온몸으로 바람의 기운을 들이킨다. 세속의 티끌마저 씻어보고자 깊숙한 호흡을 해본다. 균형추가 덜커덕거리는 길을 잠시 벗어난 걸음들이 바람처럼 의외로 유유하다. 삶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오늘도 고된 한 구비를 엮어내고 있음을 바람인들 모르리.

바다에 떠 있는 손이 기억의 매듭 하나를 푼다. 사납게 갈퀴를 세운 어마어마한 태풍이 세상을 휩쓸던 추석날 아침이었다. 퍼붓는 빗줄기에 위험수위를 넘긴 저수지가 순식간에 범람했고 천지는 물바다였다. 동생을 업고 피난길에 나선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급물살에 휩쓸렸다. 누가 팔을 붙들고 늘어지다 놓쳐버리는 걸 발견한 아버지는 한 손에 든 짐과 내 손을 놓고 달려가셨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물살과, 죽음으로 떠밀리는 어머니의 젖은 몸과, 신기(神技)의 힘으로 끌어올리던 아버지의 손. 어린 나에게 그날은 천지개벽의 순간이었다. 비바람을 뚫고 엄청난 공포에 맞선 아버지의 손은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손이었다.

손은 한 인생의 노트다. 오랫동안 받아낸 세월과 살아온 자취가 오롯이 새겨진다. 삶의 험난한 바다에서 아버지의 손은 강직하고 정직했으나 재물을 갖진 못하였다. 내 젊은 발목을 낚아채는 현실이 원망스럽던 탓에, 손을 잡아주기만 바라고 아버지의 손을 다정하게 먼저 잡아본 적이 없다. 그런 맏딸을 겉으론 무표정으로 지켜보시며 홀로 삼킨 외로움이 쓰리고 아리지 않았으랴. 이제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손, 돌아볼수록 한없이 외로운 손. 그럼에도 삶을 가꾸는 모든 손은 귀하고 아름답다.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저 손은 무엇을 꿈꾸는 걸까. 또 다른 손이 포개어주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건 아닐까. 사시장철 바람, 파도, 바닷물과 더불어 지내는 게 일상일, 조금은 서늘해 보이는 청동의 손은 언제나 무언이다. 갈매기 한 마리가 손가락 끝에 가볍게 앉았다가 날아간다. 새에겐 바다에 솟은 커다란 손이 지친 날개를 접을 수 있는 세상없는 쉼터인가보다. 바다와 손과 새의 어울림이라니, 얼마나 서로 믿고 어우러져야 사람끼리도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지.

고립이라는 막막함에 하루 일탈을 감행했던 길에서 손을 보았다. 코로나 19가 이끌고 온 의심과 불안의 공기에 ‘지나치게 혼자이다’가 달려오고 말았던 건 무슨 끌림에서였나. 호미곶 지형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형상으로 다가온다. 손이 말없이 가르침을 준다. 얼굴은 천연스레 가면을 쓰거나 입술은 새빨간 거짓말도 서슴없지만 손은 무언으로 소통하는 거라고. 쉼과 나아감이 조화롭게 이어져야 건강한 삶이라고. 한 찰나는 뜻밖의 깊은 시간도 될 수 있겠다. 하루하루가 옥죄던 차에 탁 트인 바다 곁으로 와본 것은 잘한 선택이었지 싶다. 여기 커다란 손 앞에서라도 나, 힘들다며 한 번쯤 백기를 들어보는 거다.

‘상생의 손’이 질문을 던진다. 인생은 결국 공수래공수거이거늘 어떤 손을 가졌나요? 두 손을 맞댄 채 눈을 감으면 1분 안에 서로 전기가 통하는 손이라면 좋겠다. 움켜쥐거나 오므리기만 하는 손 말고, 밀치거나 선을 긋는 손 말고, 손가락질하는 손 말고, 잡아주고 박수쳐주는 손이면 더욱더 좋겠다. 베푸는 손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런 손이기를 소망하며 두 손 모은다.

어둡고 탁한 것들을 염치없이 바다에 부려놓고 돌아서는데 아버지의 손이 다가와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준다. “따뜻한 가슴 오래 간직하여라.” 울컥, 목젖이 따가워진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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