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 핀 사랑~

…남친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차에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비꼬는 듯한 감이 든다. 무심한 듯 보여 전화했단다. 항상 말을 기분 나쁘게 한다. 전생에 원수였던가. 집으로 오라고 했다. 찜찜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남친이 태워주겠단다. 너무 깊이 사귄 것 같다. 나는 그를 섹스파트너 이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선언하고 사귄 터다. 여러 남자가 거쳐 갔다. 남자를 농락하게 된 건 언니 탓이다. 언니는 세 번씩이나 버림받고 쫓겨났다. 그러면서 대거리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런 언니를 지켜보면서 복수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남친이 태워주겠다고 우겼다. 결국 남친의 차에 탔다. 피로가 몰려와 차안에서 잠이 들었다. 언니가 불타는 가시연꽃에 휩싸여 있었다. 남친이 몸을 흔들었다. 철든 이후 언니 꿈을 꾸지 않았지만 어릴 땐 밤마다 언니 꿈을 꾸었다. 매 맞는 꿈이었고 그럴 때마다 오줌을 쌌다. 오줌 쌌다고 또 벌을 받았다. 언니가 나를 적대시한 것은 두 번째 이혼을 당하고부터다. 쫓겨 온 언니는 다른 사람 같았다. 마주친 눈빛에 적의가 묻어났다. 어느 여름날 모기장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바람에 밤새도록 모기에 뜯기기도 했다. 예닐곱 살 무렵 작은 행복을 준 추억도 있지만 언니는 오랫동안 깊은 상처를 주었다. 남친은 읍내에 남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누렁이가 맞아주었다. 췌장암 4기인 언니가 황토 방에 있었다. 언니를 휠체어에 태워 가시연꽃이 핀 연못으로 갔다. 언니가 연못을 보며 친구 얘기를 했다. ‘여자는 남자와 뽕나무밭에서 데이트를 했다. 남자가 입영통지를 받은 날,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아기를 품었다. 한편, 남자는 월남전에 파병되어 그만 전사하고 만다. 여자는 몇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고 그녀의 늙은 어머니는 늦둥이 딸을 낳았다. 그 후 여자는 자신을 학대하며 살았다.’ 대충 그런 얘기였다. 근데 언니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결혼을 하지 마라는 말 같았다. 언니는 자기가 죽거든 연못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퉁을 주었다. 하지만 가시연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진흙 속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언니 얘기를 곱씹으니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래채에 불이 났다. 언니가 불길 속에 있었다. 어머니는 “네 엄마가 불길 속에 갇혔다.”며 쏜살같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언니, 아니 두 어머니가 불속에서 산화하였다. 두 어머니를 연못이 보이는 곳에 모셨다. 남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연못을 바라본다.…

주인공은 코앞에 있는 어머니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둔감한 사람이다. 슬픈 사랑을 삭이지 못해 투정부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철부지의 뻗나간 인생이 안타깝게 펼쳐진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사랑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사랑에 목마른 두 모녀가 고루한 제도와 융통성 없는 관습이라는 허울에 얽매여, 엇갈리고 아파하는 모습에서 참사랑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행복이나 불행은 밖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자라난다. 그러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평범한 이치를 깨닫기는커녕 눈앞의 사랑마저 알아보지 못한 장님이었으니 더 이상 말하여 무엇 하리. 천추의 한으로 남아 바위 같은 응어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할 삶이 고단하다. 다만 방황하는 딸을 남친과 맺어주고 떠나간 두 어머니의 속 깊은 사랑이 뭉근하게 울린다. 오철환 (문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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