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이병식 ‘구멍 담’

발행일 2020-09-23 16:17: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동상 수상자 이병식
담장은 안과 밖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렇지만 담장에는 소통을 위한 틈새도 있다.

언젠가 송소고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심처대(深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건축한 가옥이다.

우리 조상의 후덕한 인심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위에 홍살까지 설치해 놓은 거대한 솟을대문이 낮은 담장과 대비 되어 오히려 기이한 모양새다. 마치 입을 크게 벌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하마의 입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설주에 기대선 행랑채에서 허술한 옷차림의 행랑아범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님이라도 맞으러 나올 듯했다. 행랑아범 대신 품이 넉넉한 시골 마당이 평화롭게 손님을 맞이했다. 99칸 저택의 규모가 이런 것이구나. 한 집이라기보다 동화 속의 신비한 마을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지붕이 낮은 한옥의 겸손함과 고즈넉한 고택의 평화로움 때문일까. 저택의 웅장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위압적이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지른 담장이 기이했다.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한 벽이 아니고, 꽃담인 듯 아담한 모양새의 담장이 예쁘장했다. 말로만 듣던 내외담을 직접 보는 순간이었다. 안채에 드나드는 여인들이 남정네가 서성이는 사랑채 앞을 지나다니기가 쑥스러워 이를 가리기 위해 만든 담이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 문화에서 여인네를 위한 배려였다지만, 어쩌면 양반들 스스로 쓴 사랑의 족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으로 돌아드니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아담했다. 아랫단엔 반듯한 돌을 기단으로 하여 튼실하게 하였고 위로는 v자 무늬를 연결하여 예술감을 주었다. 단절의 거부감을 없애려 한 듯했다.

그런데 특이한 게 보였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에는 장난스레 만들어놓은 듯한 둥근 구멍이 있었다. 사랑채 쪽에서 보면 담장에는 구멍이 여섯 개가 있고, 돌아들어 안채에서 보면 거기에는 구멍이 세 개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사랑채에서는 안채를 들여다볼 수 없고, 안채에서는 사랑채를 내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숫자가 많은 편이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해 웃음이 났다.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분이나 오셨나를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도록 한 예의고 배려였다. 남정네가 여인네를 보는 것은 불가하지만, 여인네가 숨어서 남정네를 살짝 보는 것은 허용된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도 마음으로 쌓아놓은 내외담이 있다. 젊은 날에 내가 직장을 잘 다니고 있을 때는 평안한 가정이었다. 나라에 외환위기의 파도가 몰아쳤다. 직장에는 구조조정의 열풍이 불었고, 나는 구조조정의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떠났다. 외환위기의 풍랑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조그만 가게를 시작했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만을 얻었다. 잘살아보자고 바둥거려 보아도 고만고만한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파도가 출렁거리듯 크고 작은 일로 집안은 늘 냉랭했다. 소통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거칠게 부서지고는 했다. 아파트 입주 때 설치한 30년 된 싱크대가 삐걱거리면 아내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누가 나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담을 쌓고 지낸다고 말하곤 한다. 무슨 가훈을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안방에도 건넌방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담장이 쌓였다. 동굴에 녹아내리는 석순처럼 오랜 세월이 흐르며 시나브로 쌓인 담장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소통을 가로막았다.

나는 얼마 전에 운동하러 동네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넘어졌다. 허리를 삐꺽했는데 정도가 심하여 며칠간 꼼짝 못 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는 지경에 도와줄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아내는 한 몸같이 내 곁에 달라붙어 움직임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며칠 후, 조금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아내는 나를 샤워장으로 데려갔다. 아내는 애들 목욕시키듯이 홀랑 벗은 나의 몸을 구석구석을 닦아주었다. 허리가 다 나은 듯이 몸이 가벼웠다. 기분은 또 얼마나 상쾌하던지. 그런데 가슴이 찡 울리며 울컥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껏 담을 쌓고 있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내가 내외담에 갇혀 아내를 보지 못할 때, 아내는 안채에서 사랑채를 내다보듯 담장의 틈새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내의 따뜻한 숨소리가 말해주었고, 섬세한 손끝의 떨림이 말해주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아내에게는 내외담도 구멍담도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외담은 내 헛된 자존심에만 존재했던 담장이었을 뿐이다.

우리 선조들의 삶이 녹아있는 고택을 느껴보는 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마저 갖게 하는 일이다. 고즈넉하게 자리한 고택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넉넉해진다. 생존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지 않으랴.

송소고택의 내외담이 아닌 사랑채와 안채를 가로막은 담장에 있던 세 구멍이 눈에 선하다. 언젠가 시간 내어 아내와 함께 송소고택을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그리고 담장의 구멍을 들여다보며 소통의 이치를 탐구해 보리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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