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인·미국인이라면 발포했을까||만만하게 보인 결과…되풀이 안되게 해야

잠시 잊고 있었던 북한 정권의 잔학성이 다시 드러났다. 무장한 군인이 우리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 또 일어났다.

북한은 실종된 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측 해역으로 들어간 우리 공무원 A씨를 지난 22일 사살했다. 2008년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경비병의 조준사격으로 피살된 데 이어 또 다시 항거불능 상태의 민간인이 집중사격을 받고 숨진 것이다.

A씨는 부유물을 타고 무려 38㎞를 떠내려가 북한 측에 발견됐다. 기력이 소진된 데다 비무장 상태여서 북한군이 발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25일 보내온 북측 통지문에 의하면 검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이 현장 사살의 이유다. 해상에서 장시간 표류한 사람을 사살하는 비인도적 행위에 전세계가 경악했다.

-북한, 중국인·미국인이라면 발포했을까

현재 북한군에는 코로나19 차단을 위해 북중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적발된 사람이 “중국과 밀무역을 하는 북한인이 아니고, 중국인이나 미국인이라면 사살하겠나”라는 의문이 든다. 해당국의 강한 반발과 보복 조치 등을 의식해 체포 후 심문하는 등의 절차를 거칠 가능성이 크다.

A씨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사살된 것이다. 처음 심문하는 북한군에게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군이 총격을 가한 것은 남한이 만만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어떤 도발을 해도 특별한 대응이 없더라는 판단 하에 저지른 만행이다. 북한이 우리를 대하는 한 단면이다.

우리 국방부는 각종 정황을 종합한 결과 북한 측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총격 후 부유물 등을 수색했지만 시신은 찾지 못했으며 많은 양의 혈흔만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실 여부에 따라 향후 논란이 증폭될 수 있는 부분이다.

A씨가 실종된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역은 우리 군의 최전방이다. 24시간 내내 일촉즉발의 긴장이 이어진다. 각종 첨단장비와 정예병력이 대거 투입돼 있다.

그런데도 A씨 실종신고 접수 후 27시간이 지나도록 행방을 찾지 못했다. 해군, 해경, 해수부 소속 선박 20여 척과 항공기 2대까지 투입돼 수색을 벌였지만 작은 단서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합동 경계·수색 능력에 한계를 노출시킨 것이다. 감시 사각지대나 노후 장비가 없는지 점검하고 최우선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충격적인 사건으로 매우 유감스럽다.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북한 당국은 책임있는 답변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루 뒤 북한 통일전선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 준 것에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는 내용을 담은 통지문을 청와대에 보내왔다.

북한 측은 현장에 있던 정장(艇長)이 사격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군 최고 수뇌부가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이 자신들의 사과에 최소한의 진정성이라도 담으려면 우리 측이 요구하는 남북 공동조사에 응해야 한다.

그래서 사건의 진상을 한점 숨김없이 밝히고 최종 책임자를 찾아내 엄중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는 작은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만만하게 보인 결과…되풀이 안되게 해야

이번 사건은 남측의 엄중 항의와 북측의 사과 표명에 이은 후속 조치 등으로 조기에 일단락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하지만 남북 관계에 지워지지 않을 또 하나의 생채기로 남을 것이다.

모든 국민이 전쟁은 안된다는데 동의하지만 이번과 같은 만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모한 도발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북한에 일깨워 줘야 한다. 말로만 하는 경고는 안된다. 국제사회 공조를 통한 다양한 압박이 가장 현실적 방안이다. 한미, 한미일 등 우방 간 공고한 공조는 그 자체로도 강력한 대북 압박이 된다.

남북대화는 이어가더라도 장밋빛 평화 모드에 집착하면 안된다. 몇 차례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거치며 우리가 남북관계의 냉엄한 현실을 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지국현 논설실장



지국현 기자 jkh8760@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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