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82) 중생사

당나라 황제의 꿈을 그렸던 화백, 영험한 중생사 11면관음상 만들어

경주 낭산에서 출토된 관음보살입상. 이 관음보살상은 일제강점기 때 머리가 먼저 발견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었다. 몸체와 기단은 낭산 밭둑에 묻혀 있었다. 1997년 머리와 몸체를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 전시하고 있다.
신라시대 중생사는 경주 낭산 일대에 있었던 제법 규모가 있었던 사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생사에는 당나라의 유명한 예술가가 조성한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이 관음보살상에 기도해 이루어진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영험한 부처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 최은함은 기도로 아들을 낳고, 전쟁터에 나간 사이 그 아이를 돌보아 주기까지 했다. 부처가 직접 시주를 하고, 법당에 불이 났을 때 스스로 절문 밖으로 불을 피해 나앉은 일 등이 이야기로 전한다.

경주 낭산의 중생사로 전해지는 절터에서 발견된 십일면관음보살입상, 키가 큰 관음보살입상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 전시되고 있다. 또 현대에 들어와 중생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는 곳의 서쪽에 마애보살삼존좌상이 있다. 이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눈길을 끈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의 북서쪽 방향에 중생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신라시대 절터에 현대에 새로 지은 사찰인데 주변에 신라시대 석재가 아직도 널려 있다.
◆삼국유사: 중생사

다음은 신라 고전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당나라 천자가 대단히 예뻐하는 여자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누구와 견줄 데 없으니 “예로부터 이제까지 그림에서도 이 같은 여자는 드물다”고 할 정도였다.

황제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사람이 명령을 받들어 그림을 완성했는데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아래가 붉은 자국으로 더럽혀졌다. 그것을 고치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붉은 표시가 분명코 날 때 생겼으리라 생각하며, 그림을 그대로 바쳤다.

황제가 “겉모습은 매우 그대로이구나. 그런데 배꼽 아래 표시는 안에서만 아는 비밀인데 어찌 알고 함께 그렸는가”며 추궁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옥에 가두고 벌을 주려 하자 승상이 “그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습니다”며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황제는 “그렇게 현명하고 곧다면 지난 밤 내 꿈속의 모습을 그려내어라. 그대로 그린다면 용서하리라” 했다. 그 사람이 곧 11면 관음상을 그려냈다. 꿈과 맞으니 황제는 의심이 풀려 용서해 주었다.

현대 지어진 중생사 앞마당에 신라시대 석재로 쌓아 올린 석탑.
풀려나자 그는 박사 분절에게 “내가 듣기에 신라 나라는 불교를 깊이 믿는다 하오. 그대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함께 불사를 닦고 어진 나라에 널리 이익을 준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라고 했다. 드디어 함께 신라에 도착해 중생사의 대비상을 완성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 기도를 드려 복을 받은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 천성 연간(926~927) 이었다. 정보 최은함이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이 절의 부처님 앞에서 기도했다. 태기가 돌아 아들을 낳았다.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백제의 견훤이 서울을 쳐들어와 성안이 온통 혼란에 빠졌다.

은함이 아이를 안고 와서 “이웃 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대성께서 주신 아이라면 부처님의 힘을 빌려 이 아이를 키워주시고,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며 아이를 부처님 앞에 두고 전쟁터로 나갔다.

보름쯤 지나 적들이 물러가자 와서 찾아보니, 아이의 피부가 마치 새로 목욕한 듯 몸이 반들반들하며 입 언저리에서는 아직 우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안고서 돌아와 길렀는데 자라자 남보다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최승로이다. 지위가 정광에 이르렀다.

중생사 앞에 신라시대의 석탑 옥개석과 몸돌, 건물 기초석 등의 석재가 쌓여 있다.
또 992년 3월에 절의 주지 성태 스님이 보살 앞에 꿇어 엎드려 “제가 이 절에서 오랫동안 거처하며 열심히 향불을 피우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에 밭이 없어 향불 피우기를 계속할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이날 언뜻 잠이 들었는데 꿈에 대성이 나타나 “그대는 여기 머물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모아 향 피울 돈을 충당하겠노라”고 말했다.

스님은 좋은 기분으로 깨어나 거기 머물고는 떠나지 않았다. 13일 뒤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왔다. 스님이 나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

“우리들은 금주 땅 사람들입니다. 저번에 한 비구 스님이 우리에게 와서 내가 서울의 중생사에서 머문 지 오래되었다. 공양드릴 일이 어려워 시주를 받으러 왔다라고 하였소. 그래서 우리가 인근 마을에서 시주를 모으되, 쌀 6석과 소금 4석을 지고 왔습니다.”

“이 절에서는 시주받으러 나간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이 잘못 들었는가 싶소” 하니 “지난번 비구 스님이 우리를 데리고 와서 이 신현정 우물가에 이르러 절까지가 멀지 않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그대로 따라 절에 온 것입니다”고 했다.

경주 낭산 서쪽에 신라시대 조성된 마애보살삼존좌상이 새겨진 바위를 보호하고 있는 마애불전.
스님이 그들을 인도해 법당 앞에 들어갔더니 그 사람들이 대성에게 예를 갖추며 “이분이 시주를 거두던 분의 얼굴이다”고 서로 말하며 놀랐다. 이 때문에 절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저녁 절의 문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다 법당에 올라가 보니 불상이 간 데가 없었다. 찾아보니 벌써 뜰에 있었다. 서로 물어보니 아무도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관음보살의 영험함을 알았다.

또 계사년(1173)에 점숭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거처하고 있었다. 글을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성품이 본디 순수하고 향불 피우기를 무척 부지런했다. 한 스님이 그 거처를 빼앗으려고 친의천사에게 “이 절은 나라에서 은혜와 복을 비는 곳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를 뽑아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

천사가 그렇다 하고,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 문서를 거꾸로 주었는데 점숭은 펼쳐서 유창하게 읽는 것이었다. 천사는 탄복하며 방안에 돌아와 앉았다가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다. 점숭은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못했다.

천사는 “이 사람은 진실로 대성이 지키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 빼앗지 않았다. 당시 점숭과 함께 거처한 처사 김인부가 이 이야기를 노인들에게 전하고 전기로도 써두었다.

경주 낭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십일면관음보살입상.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1개의 얼굴을 한단에 일렬로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삼존불 가운데 오른쪽 협시보살로 보여진다. 본존불과 왼쪽 협시보살은 찾을 수 없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중생사

신라말기에 나라의 일을 하는 하급관리가 늦둥이를 얻었는데 아주 예쁘게 생긴 여식이었다. 관리는 그 딸자식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집안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도 앉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관리는 딸아이를 위해 좋다는 약은 죄다 사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생사 관음보살이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업고 중생사로 달려갔다.

관리는 딸아이를 관음보살 앞에 내려놓고는 엎드려 절하며 울며 빌었다. “부처님 우리 아이가 일어나 뛰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을 보게 해 주신다면 저는 평생 부처님의 종이 될 것이며 아이 또한 부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며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기도했다.

신라시대 중생사 터로 보이는 곳에 현대 중생사라는 절이 있다. 중생사 입구.
기도하기 시작한 지 보름째 되는 날 관리가 저도 모르게 법당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 관음보살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가보아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관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관음보살이 꿈속의 그 모습으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주변에 그윽한 향기가 넘쳐나는 것을 느꼈는데 문득 데리고 왔던 딸아이가 안보였다. 퍼뜩 정신이 든 관리는 부처님의 목소리가 생각나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그 관리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딸아이가 “아빠 또 부처님께 인사하고 오시는 길이세요”라며 뛰어와 안겼다. 관리는 꿈인가 싶어 한참 안고 있던 딸아이를 품에서 떼어 다시 들여다보기를 여러 차례 했다.

관리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세간살이조차 팔아 모두 정리하고 중생사로 들어와 불목하니를 자처해 정성껏 절의 일을 보살폈다. 그는 스스로 부처의 자식이라며 이름도 ‘불종’으로 개명했다.

경주 낭산 서쪽기슭 암벽에 새겨진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훼손이 심하다.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돼 있어 귀중한 자료로 학계의 관심이 높다.
딸아이는 부처님의 덕으로 다시 얻은 아이라 하여 ‘덕득’이라 이름을 고쳐 지어 불렀다. 덕득은 총명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렸다.

덕득은 자라면서 남자를 능가하는 힘으로 산을 뛰어다니며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려 활을 쏘는 등 무술에 관심을 두었다. 불종은 처음에는 덕득에게 글 읽기만 하라고 권하다가 늦게는 그냥 두었다.

덕득은 여장부로 자라 결국 남장을 하고 군인이 되어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신라가 패망하게 된 견훤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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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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