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사상 따라 지어진 사찰 걸음마다 깨달음 깊어진다

▲ 봉정사는 2018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됐다. 사진은 봉정사 전경.
▲ 봉정사는 2018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됐다. 사진은 봉정사 전경.
세계문화유산 봉정사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봉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72년 극락전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는 의상대사 제자인 능인스님의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봉정사는 2018년 6월30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 확정됐다.

봉정사는 흔히 ‘고건축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 다포 양식의 전형인 대웅전을 비롯해 고금당, 화엄강당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소나무 터널과 일주문에서 안내판까지의 참나무 그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천등산 정상 천등굴로 이어지는 등산길이 봉정사 관람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매표소를 지나 길 양옆 소나무 숲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다 보면 왼쪽 편 나무 숲 사이로 작은 정자가 하나 보인다. 이것이 명옥대(문화재 자료 제174호)이다. 명옥대는 원래 낙수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수양차 왔다가 이름이 너무 밋밋하다 하여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옥 굴러가는 소리와 같다’고 명옥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명옥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앞에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 불국정토에 들어서면 참나무 가지가 하늘을 가려 어두운 터널을 만들어 준다. 이 터널 아래서 마음을 잠시 가다듬어 보자.

▲ 봉정사 일주문 전경. 봉정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 봉정사 일주문 전경. 봉정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봉정사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자, 사찰의 경계이다. 곧 일주문을 지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한마음(一心)을 뜻한다. 항상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봉정사는 불교사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건립된 사찰이다. 그러나 화엄의 철학적 체계가 깨달음의 세계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수행자의 수행단계별 공간배치인 사찰구도와 배치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화엄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의상대사는 수행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정토사상을 적절하게 조합시켜 사찰구도를 잡고 건물과 계단을 배치했다. 3단계의 계단과 덕휘루를 통과하는 것은 부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며, 이는 수행자의 수행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는 이러한 수행의 계단과 덕휘루를 거쳐 깨달음의 세계, 곧 부처를 만날 수 있다.

▲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봉정사 만세루 전경.
▲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봉정사 만세루 전경.
◆만세루(덕휘루)

만세루(유형문화재 제325호)는 사찰의 중심 공간인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곧 속세를 떠나 온갖 번뇌와 망상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부처의 세계로 귀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통로로서 기능을 한다.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 운판, 범종, 법고 등으로 불리는 불교의 사물(四物)을 걸 수 있는 종루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 봉정사 극락전 전경.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물 중 최고의 건물이다.
▲ 봉정사 극락전 전경.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물 중 최고의 건물이다.
◆극락전

극락전(국보 제15호)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해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신라 문무왕 때 능인 대덕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이후 여러 스님에 의해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또 다시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공민왕 12년, 1262년)에 예안의 용수사 축담스님이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해 수리한다”고 적혀 있었다.

극락전의 또 다른 가치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의 고형과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이 극락전의 간결하면서도 각 부재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건물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해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 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규모가 작은 석탑이 하나 있다. 가람 배치나 조성 양식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정된다.

▲ 고려말 또는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봉정사 대웅전 전경.
▲ 고려말 또는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봉정사 대웅전 전경.
◆대웅전

봉정사 본전인 대웅전(보물 제55호)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 있는 극락전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우리 한옥의 멋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웅전은 1999년부터 해체·보수작업을 했다. 이때 후불탱화 뒤에 벽화를 발견했다.

이 후불 벽화는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림의 표현기법이나 구도 색조에 고려 불화의 특징을 담고 있어 대웅전의 건축 연대를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려 보기도 한다.

극락전이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의 형태라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극락전이 지붕의 무게를 받쳐주는 공포를 기둥 위에만 두는 주심포 방식을 사용했다면, 대웅전은 기둥과 기둥을 이어 주는 평방이나 창방 위에도 공포를 두는 다포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두 건물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금당과 화엄강당은 주심포 방식의 변형인 익공 방식을 사용해 건축했다. 즉 고려 초의 건축양식인 주심포 방식, 고려 말 조선 초에 주로 사용한 다포양식, 조선 중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익공 양식의 건물이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봉정사에 오면 우리 한옥의 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고건축 박물관이라 부르는 것이다.

▲ 봉정사 고금당 전경. 봉정사 초창기 수도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봉정사 고금당 전경. 봉정사 초창기 수도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금당

화엄강당과 함께 극락전 양쪽에 서있는 것이 바로 고금당(보물 제449호)이다. 이름 그대로 옛 금당이라는 뜻이다.

‘금당’은 원래 삼국시대에 절의 가장 중심 건물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 명칭이다. 그렇다면 고금당은 본래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봉정사 초창기의 수도 암자였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1616년에 중수한 조선 초기 건물이다. 봉정사의 다른 건물이 그렇듯이 규모가 작은 건물치고는 지붕이 크고 처마가 깊어 큰 갓을 쓴 것처럼 보인다.

▲ 봉정사 3층 석탑.
▲ 봉정사 3층 석탑.
◆삼층석탑

극락전의 정면에 있는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돼 있다.

이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부분은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318㎝이다.

2층 기단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는 화엄강당 전경.
▲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는 화엄강당 전경.
◆화엄강당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을 가르는 듯이 앉아 있는 건물이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이다. 지금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쓰이고 있지만 건물의 명칭을 보아서는 한때 강당이었던 듯하다.

규모에 비해 기둥이 짧고, 지붕이 무거워 보인다. 이것은 화엄강당 지붕이 대웅전 아래에 맞물려 들어가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대웅전 쪽의 벽체에 살창이 나 있는 것이다. 이 살창은 강당이었을 당시 채광을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스님의 요사채로 사용되는 봉정사 영산암 전경.
▲ 스님의 요사채로 사용되는 봉정사 영산암 전경.
◆영산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영산암(민속자료 제126호)은 대웅전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한참 오르면 나타난다.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우화루라는 현판이 달린 누각인데 원래 극락전 앞에 있었던 누각이다. 이 ‘우화(雨花)’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으로 설법했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우화루라는 현판을 달 수 있는 곳은 높은 경지의 고승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한다.

우화루 아래를 지날 때에는 키 큰 사람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누구나 고개를 숙이고 지나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 아래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숙인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모양 좋은 소나무 한 그루와 큰 바위 하나가 마당 한 켠을 차지하고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나타내 준다. 전면의 법당과 삼면으로 둘러싼 요사채가 일반 여염집 같은 안마당을 만들어 준다.

법당에 봉안돼 있는 불상은 흙으로 조성된 토불로서 규모가 크면서도 왠지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또 법당 외벽에는 우리나라 민화에나 나오는 호랑이와 까치의 그림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요사채는 신발을 벗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 또 다른 특색이다.

이곳은 지금도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조심스럽게 둘러봐야 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마루에 조용히 앉아 고즈넉한 분위기에 한번 젖어 보는 것도 좋다.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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