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륜사 진자 스님이 웅천 수원사로 가서 미륵불을 만나 화랑이 되다

▲ 신라 중흥기에 흥륜사의 진자 스님이 부처님 보기를 간절히 염원하자 꿈을 통해 웅천의 수원사로 가면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공주의 수원사지에는 금당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 신라 중흥기에 흥륜사의 진자 스님이 부처님 보기를 간절히 염원하자 꿈을 통해 웅천의 수원사로 가면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공주의 수원사지에는 금당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나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불교의 융숭한 발전 덕택이었다.

국론통일을 이끌어낸 국민들의 정서적 안정과 화합을 이룬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더불어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미륵선화와 진자사편은 이러한 신라를 관통하는 국가적인 정서를 그대로 축약 표현하고 있다.



진흥왕이 인재양성을 위해 처음 원화제도를 도입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어전 화랑제도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육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 법흥왕의 뜻에 따라 불교를 장려해 황룡사, 흥륜사 등의 국가적 사찰을 건립해 국론통일의 기반을 조성했다.



삼국유사는 진자 스님이 흥륜사에서 공주 수원사를 거쳐 다시 서라벌 영묘사까지 구도에 이르는 길과 화랑으로 활동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진자 스님이 부처를 직접 만나기 위한 염원은 꿈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서라벌에서 웅천까지 삼보일배로 정진하는 모습과 불교의 궁극적인 이치를 깨우쳐가는 과정을 소개하며, 애국심은 화랑의 활동을 통해 보여준다.





▲ 신라 흥륜사 진자 스님이 부처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수원사에 남은 석탑 흔적. 석탑 기단석과 우주 탱석 일부의 모습.
▲ 신라 흥륜사 진자 스님이 부처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수원사에 남은 석탑 흔적. 석탑 기단석과 우주 탱석 일부의 모습.




◆삼국유사: 미륵선화와 미시랑 그리고 진자사

제24대 진흥왕은 성이 김씨고 이름은 삼맥종이다.

심맥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양나라 대동 6년 경신년(540)에 즉위하였다.



큰아버지 법흥왕의 뜻을 좇아 한마음으로 부처를 받들고 널리 절을 만들었으며 사람들을 인도해 승려가 되게 했다.



또 타고난 성품이 풍류를 즐기고 신선을 높여 여자아이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골라 원화로 세웠다.

인물을 뽑아 효제와 충신으로 가르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낭과 교정낭을 세워 무리 300~400명을 모았다.



교정낭은 남모낭을 질투했다.

술을 많이 가져다 놓고 남모낭에게 마시게 하고, 남모낭이 취하자 슬그머니 북천으로 데리고 가서 죽인 후 돌을 들어 그곳에 묻었다.

남모낭의 무리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며 흩어졌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

노래로 지어 동네 어린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했다.

남모낭의 무리들이 듣고 시신을 북천에서 찾아낸 다음 교정낭을 죽였다. 이에 왕이 원화를 폐지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 신라시대 웅천, 지금의 공주에 남은 수원사지. 밭으로 경작하고 있던 부지를 1967년과 1991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석탑지 등 4개의 건물지를 확인했다.
▲ 신라시대 웅천, 지금의 공주에 남은 수원사지. 밭으로 경작하고 있던 부지를 1967년과 1991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석탑지 등 4개의 건물지를 확인했다.


몇 년이 지났다.

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모름지기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의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아 화랑이라 했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추대해 국선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작이며 명주에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악한 짓은 반성해 착하게 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며 아랫사람을 바로 이끌도록 했다. 이때에 오상, 육예, 삼사, 육정이 널리 행해졌다.



진지왕 때에 흥륜사에 진자라는 스님이 있었다.

매번 절에서 모시는 미륵불상 앞에서 “바라옵건대 우리 부처님께서 화랑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늘 가까이 모시고 받들어 두루 시중을 들겠나이다”며 소원을 빌며 맹서했다.



그 정성이 매우 간절했다.

하루 저녁에는 꿈을 꾸는데 어떤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너는 웅천의 수원사로 가라. 미륵선화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 수원사지를 밭으로 경작하던 농부가 절터 앞에 복원해둔 연못지.
▲ 수원사지를 밭으로 경작하던 농부가 절터 앞에 복원해둔 연못지.




진자가 깨어나서 기쁘고도 놀라 그 절을 찾아가는데 열흘을 가면서 발걸음마다 예불을 드렸다.

그 절 문밖에 이르자 맑고 깨끗한 청년이 맞이하며, 작은 문으로 안내해 손님이 묵는 방에 모셨다.



진자가 올라가 머리를 숙이며 “그대와 평소 알고 지내지 않았는데 어찌 접대가 이처럼 정중합니까?”라고 말하자 “저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머나먼 길을 오신 것을 보고 와서 챙겨드린 것뿐입니다” 했다.



조금 후 문 밖으로 나갔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이라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스님에게 지난날의 꿈과 일어나서 오게 된 뜻만 말했다.

그러면서 “잠시 저 아래 자리에 머물며 미륵선화를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 수원사지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 두고 있다.
▲ 수원사지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 두고 있다.


절의 스님은 “여기서 남쪽 마을로 가면 천산이 있소. 예로부터 현철하신 분이 살고 있어 깊은 느낌이 많다오. 그 거처로 가보시지 않겠소?”라고 답했다.



진자가 이 말을 따라 산 아래에 이르자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해 나와 맞으며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 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다시 와서 무얼 찾아?”라며 오히려 물었다.



진자가 듣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본사로 돌아와 한 달 남짓 지냈다.

진지왕이 이를 듣고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묻고는 “청년이 서울사람이라 했다면서? 성인이 빈말을 하겠느냐, 성안을 찾아보면 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진자가 왕의 가르침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샅샅이 찾았다.

그런데 곱게 차려입은 수려한 소년이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 나무 아래서 팔짝거리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보고 놀라며 “이 이가 미륵선화이다”라며 나아가 ”그대는 집이 어디인가? 성씨도 좀 알고 싶은데?“라고 물었다.

소년은 “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성은 뭔지는 모릅니다”고 답했다.



▲ 금당지와 석탑지 등의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는 수원사지에 감나무 등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 금당지와 석탑지 등의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는 수원사지에 감나무 등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에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 왕에게 뵈었다.

왕은 공경하며 추대해 국선으로 삼았다. 여러 무리들과 화목하며 예의가 바르고 의리를 지키는 모습이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세상에서 7년쯤 활약하더니 문득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진자의 슬픔은 너무나도 컸다.

그러나 자애로운 은택을 실컷 누리고 맑은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스스로 고치고 부지런히 수도하여 도를 이뤘다.

아쉽게도 말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수원사지를 밭으로 경작하던 농민이 밭에서 나온 돌 등으로 쌓은 돌담.
▲ 수원사지를 밭으로 경작하던 농민이 밭에서 나온 돌 등으로 쌓은 돌담.








◆새로 쓰는 삼국유사: 미륵불을 만난 진자 스님

신라 24대 진흥왕은 정복군주로 불릴 정도로 나약했던 신라를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시켰다.

진흥왕은 강한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 청년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화랑제도를 크게 강조했다.



또 전국에서 뛰어난 청년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선발해 학문과 무예는 물론 예술까지 교육해 강한 군대 조직으로 육성했다.



진흥왕 말기에 흥륜사의 이름 높은 진자 스님이 추천하는 미륵선화를 국선으로 삼았다.

미륵선화는 외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예도 출중하며 훌륭한 통솔력을 갖춰 화랑도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다.



미륵선화는 낭도들과 밤낮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낭도들이 모두 흥겹게 시간을 노는 듯 흘려보냈지만 곰곰이 되돌아보면 노는 일들이 모두 전략전술을 익히는 것이자, 예법을 몸으로 익히는 공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낭도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쉬는 시간에 함께 마시는 곡주는 가끔 취할 만큼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국선 선화랑이 흘려보내는 신비스런 향이 낭도들을 정신적으로는 취하지 않게 했다.





▲ 수원사지 앞으로 넓게 펼쳐진 절터. 충청남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수원사지 앞으로 넓게 펼쳐진 절터. 충청남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왕위를 이으면서 국정은 문란하게 퇴락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노려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이 산발적으로 침략해와 신라가 점령했던 땅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갔다.







이때 진지왕을 앞세워 권력다툼을 벌이던 미실과 거칠부는 선화랑이 이끄는 화랑도의 세력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상대등의 지위에 있던 거칠부가 선화랑을 불러 백제 땅을 치는데 앞장서도록 명했다.







미륵선화는 낭도들을 이끌고 백제군사들이 집결해 있던 웅천 관산성으로 진군했다.



미시랑은 낭도들에게 진군하면서 노랫소리에 맞춰 빗자루를 들고 흔들도록 했다.



이 모습이 백제군들의 눈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십만 대군이 말을 타고 내닫는 것과 같이 보여 모두 성을 버리고 삼십 리 밖으로 퇴각했다.







승전보가 서라벌 궁성에 도달하자, 거칠부는 선화랑에게 다시 고구려를 칠 것을 명했다.



하지만 미륵선화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미륵선화는 수원사에서 도를 닦는 승려들을 돌보는 불목하니가 돼 있었다.



미륵선화를 찾던 진자 스님도 낭도의 무리에서 벗어나 수원사에서 도를 닦아 성불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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