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서 좋은 지금/ 박소유

발행일 2020-10-11 13:56:2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처음 엄마라고 불러졌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낯가림도 없이 한 몸이라고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복음이었나/ 앞만 보고 가면/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깜무소식이다// 그믐이다/ 어둠은 처음부터 나의 것/ 바깥으로 휘두르던 손을 더듬더듬 안으로/ 거두어들였을 때 내가 없어졌다/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천년의시작, 2011)

엄마란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울컥한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말임에 틀림없다. 종족보존 본능에 기해 생명을 보듬고 복제한다. 엄마는 잉태하는 열 달 동안 태아를 보호해주는 숙주이고 세상에 나와 최초로 만나는 수호천사다. 인간은 미숙한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홀로 생활하기 위해선 오랜 세월 정신적 육체적 양육을 필요로 한다. 홀로 설 때까지 먹이고 입히며 재워 줄뿐더러 정서적으로 단련시켜주고 지적인 훈육도 책임진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보살핌의 끈을 놓지 않는 질긴 숙명을 타고난다. 엄마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신하지 않는 후원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식 편에 서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지 모른다.

종족보존은 모성애 본능에 크게 의존한다. 모성애는 잉태하는 순간 발현되지만 태아가 몸 밖으로 나올 때 본격적으로 시현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때 알 수 없는 낯선 책임감에서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질 수도 있으리라. 엄마의 딸과 실존적 자아로 살아온 지난 세월과 고별하고 연약한 아들딸의 굳센 엄마라는 본능적 굴레에 갇히게 된다. 뒷덜미를 잡힌 것 같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진 않다.

엄마는 자신을 잊고 오직 아들딸을 위해 헌신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앞만 보며 산다. 그렇게 하면 자식이 엄마가 인도하는 길로 잘 따라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엄마는 처음부터 배경이고 조연이지만 아들딸은 시종 형상이자 주연이다. 아들딸이 밝은 달이라면 엄마는 어둠이란 배경일 뿐이다. 아들딸을 더욱 빛나게 하고자 한다면 엄마는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야 한다.

그러던 어느날, 무심코 뒤를 돌아다본다. 잘 따라 오리라 믿었던 아들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위가 깜깜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들딸은 엄마만 따라오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닌 독립된 자아를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뒷바라지만 하며 살다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은 자기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넋 나간 주름 잡힌 유령이다. 그제야 엄마의 본성을 성찰한다. 엄마의 삶은 단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뿐이었다. 엄마의 삶이 단지 자식에 종속된 것일까. 달이 밝게 보이도록 하는 어둠의 역할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한 인격체로서 자아실현욕구를 가진다. 모성애가 본능이라지만 생명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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