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려상 수상자 유종인
▲ 장려상 수상자 유종인
가을 속에 여름이 갈마들어 있다. 그 여름 염천 뙤약볕 속의 짙푸른 은행나무를 보면서도 내심은 달포가 좀 더 지나면 샛노란 황금나무로 물들어 있을 그 휘황찬란함을 떠올렸다. 그러니 저 황금빛 노랑의 갈무리 속에 저 여름의 진초록 생색이 다스려져 있다.

어머니의 생전에 한 번 다녀왔으면 싶어 내심 점지해 둔 곳이 운문사 도량이었다. 그 경내의 늦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정취를 당신 눈 안에 넣어드리고 싶었다. 수백 년 된 샛노란 노거수(老巨樹)는 당신이 보셨더라면 저승에 가셔서도 눈에 삼삼하니 수시로 아들 생각을 하기에 맞춤한 선처가 아니었을까. 사람으로 치면 지워지지 않는 눈부처 같았을 것이다.

혼자 갔지만 어머니 생각이 오롯하니 내 마음에 팔짱을 끼고 풀지 않는 듯하다. 남들은 모를 것이니 혼잣말처럼 당신한테 비구니 스님들 출타한 선원(禪院)의 정갈함도 얘기하고 근동의 채마밭에 울력 간 스님들 수다 떨며 돌아오는 모습도 귀띔해 드리고 싶다.

누구는 휴대폰 통화를 하는 줄 알 것이지만 나는 그것 없이도 광대역의 주파수 같은 속종으로 이승과 저승을 너나들이 내통하는 심정이다. 내가 느끼고 전한 대로 고스란히 귀 기울여 들어주실 거라 여기는 큰 은행나무의 가을이 통째로 당신께 전송되는 듯하다.

웅장하고 듬쑥한 황금나무였다. 유독 맑은 날이었으면 제 그림자에 은행나무는 노란 은행잎으로 진솔의 옷 한 벌 해 입히느라 황금의 조락이 자자하다. 올 한 해 늙고 높은 나무에 초록을 입히느라 수고했어. 샛노란 쪽매의 잎들로 모자이크하듯 촘촘히 천상의 황금 옷을 지상의 그림자에 가붓하게 내려 입히는 수순이 가으내 깊어간다. 봄부터 여름, 초가을까지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준 보답이라도 하듯 제 나무 그림자에 황금 옷을 해 입히는 듯했다.

나는 자꾸 혼잣말을 주워섬긴다. 어머니 당신은 어떤 특별한 장치가 없이 아들의 말을 고이 들으실 듯하다. 그럴 때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 아래만이 당신과 통하는 내 이승의 오롯한 현주소인 양 환한 적막 속이다. 천지간(天地間)을 크게 벌리고 있는 은행나무는 크나큰 침묵의 신목(神木)인 양 늠름하고 장엄하다.

어머니는 내가 주워섬기는 말을 말없이 듣고 가만히 미소 짓고 무심한 듯 흘리시고 깊이 품으실 것이다. 후드득 떨어지는 은행잎이 내 어깨를 감싸듯 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허공의 황금빛이 땅의 황금빛으로 환승하는 순간엔 말문이 탁 막히며 그저 천지간(天地間)의 조화를 당신과 함께 해찰하듯 바라보고 싶었다. 단색의 은행잎 같았지만 수백 가지 혹은 수천 가지 빛깔로 매 순간 환생하듯 가을볕에 따라 뉘앙스를 달리했다. 저게 다 물과 불의 천지조화란다, 하고 내게 귀띔을 해주는 건 누구일까. 당신일까 가을볕에 실린 바람의 환청일까.

그때 가을 채마밭에 울력을 다녀오는 비구니 스님들의 차량이 지나갔다. 불가의 용맹정진을 일상의 노동으로 확장해낸 듯하다. 밀짚모자에 목장갑을 끼고 목에 수건까지 두른 스님들이 탄 트럭의 적재함이 유쾌한 야단법석(野壇法席) 같다. 그런 스님들 울력 갔다 오는 트럭 위에도 노란 은행잎이 흩날렸다. 살아서 심상하고 소소한 일들에도 축원의 꽃잎을 뿌려주듯 은행나무는 그 가을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자신은 헐벗으면서도 그 황금빛 귀티를 서슴없이 벗어 세간에 선선히 내주는 게 은행나무는 가을 울력 같았다. 그러고 나서 헐벗은 그 자리에 피보다 진한 파란 하늘이 강림했다.

샛노란 황금 옷을 벗어 세상에 내주는 은행나무나 세상이 버린 헝겊 조각을 주워다 기워서 만든 검은 납의(衲衣)를 입는 스님이나 무욕(無慾)의 한통속 반열만 같다. 소탈한 납가사(臘袈娑) 한 벌로 일생이 족한 스님의 무소유와 생전에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주변에 베푸는 손이 컸던 어머니 당신이나 그리고 저 황금나무의 황금빛 보시(布施)도 가을에 새삼 재장구치는 맑고 소슬한 한통속의 보살행 근처 같다.

거기에 맞춰 은은한 풍경소리가 나목이 돼가는 은행나무에 푸른 하늘 옷 한 벌 맞춰주려는 명랑한 재단사의 음률로 경내를 번져간다. 한 벌의 가을 황금 옷을 벗어주고 또 한 벌의 파란 하늘 옷을 소슬하게 걸치는 은행나무의 과정은 살아있는 해탈(解脫)의 적막한 소란 같았다.

늦여름 오후의 무더위 속에 녹의(綠衣)를 걸치고 우거졌던 은행나무가 순연한 가을볕 속에 샛노란 반색이 완연하다. 지지난밤 꿈의 어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허기져 보였다. 그러면서도 내 끼니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 오히려 애잔했다. 그런 당신을 위해 약식으로 예불을 하고 나오다 처마의 쇠물고기 풍경과 잠시 눈 맞춤을 한다. 요란하지 않은 풍경소리가 드문드문 누군가를 부르는 듯하다. 당신을 맘으로만 부를 뿐 몸으로는 부를 수 없는 몬존한 처지인데 은행나무는 삶과 죽음을 그 우듬지부터 뿌리까지 한 몸으로 거느린 듯 우람하고 훤칠하다.

비구니 도량을 에워싼 번수(蕃秀)의 여름빛과 햇살의 단내를 느끼던 여름 절간의 아우라가 새삼 반추되는 가을 오후다. 꿈의 어머니처럼 나도 괜스레 출출함을 받아든다.

운문사를 내려와 한 식당을 찾아 들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훑어 은어회와 은어 튀김을 반반씩 시켰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생전에 은어회를 한 번이라도 드셔보셨을까. 나는 역광이 비쳐드는 창문 너머의 개오동나무를 보며 혼잣말처럼 당신께 물었다. 은어회 한 번 드셔보시긴 하셨어요? 이런 물음이 면구스럽다.

나는 묻고 당신은 종내 묵묵하다. 생전에 이빨이 시원찮으셔서 틀니를 뺐다 꼈다 하셨다. 가끔 잇몸이 들뜨는 경우엔 틀니가 맞지 않아 애를 잡수셨다. 그래 그럴 땐 이런 은어회 한 접시쯤 좋이 드시면 수박 향이 감도는 그 입가는 얼마나 향기롭고 산뜻했을까. 자식은 이렇듯 늘 말뿐이고 맘뿐이다.

청아한 수박 향내가 서린 은어회라면 틀니를 빼고도 잇몸과 혀가 능히 갈무리했을 것이다. 정작 은어회는 내 혀끝에서만 고소하고 향긋한 수박 향은 당신에 대한 향수처럼 애잔해진다.

당신을 대신해 맛보기라도 한 듯 은어회와 은어 튀김이 소주 반주와 더불어 풍미를 더해온다. 은어회를 먹고 식당을 나오는데 개울에 얼비친 역광의 노을이 윤슬로 더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때 문득 운문사 만세루의 저녁 범종을 치던 비구니 스님의 실루엣이 아름다웠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더라 어령칙한 기억을 되새기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비록 범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노을 앞에서 큰 북을 치는 듯 장엄(莊嚴)의 일출과 일몰이 갈마드는 속종만 같다. 마음으로 함께한 어머니와의 가을 운문사 소풍은 마치 이승과 저승이 반보기 하듯 넘나드는 동행만 같았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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