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려상 수상자 임길순
▲ 장려상 수상자 임길순
삼강주막 툇마루에 걸터앉아 속절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이 비는 그칠 줄도 모른다. 유난히도 긴 장마다. 나루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조차 비를 머금어 후텁지근하다. 한때 보부상들과 사공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이젠 전설처럼 이야기만 전해올 뿐 예전 일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많은 나그네는 다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주모, 여기 막걸리 한 통 주시오.”

부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늙은 주모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술상을 차리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진 길손들의 왁자한 삶의 애환들이 환영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한 유옥연 주모가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60여 년을 운영했던 예천 삼강주막. 소금과 쌀을 싣고 온 상인들과 보부상들,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은 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밤새 고달픈 세상사를 이야기했다. 농사에 지친 동네 사람들에겐 목마르면 달려와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가던 사랑방이었다. 그 밤, 과거를 보러 가던 이는 간절하게 장원급제를 염원했을 것이고, 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비싼 금으로 팔리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2005년 ‘경북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된 삼강주막은 120년 전인 1900년에 지어졌다. 당시 조선에는 12만여 개의 주막이 있었다. 그렇게 호황을 누리던 주막들은 일제의 간섭으로 1919년엔 7만여 개, 1930년엔 5천여 개로 줄어들다가 이제는 낙동강 칠백 리에 유일하게 삼강주막 하나만 남게 되었다. 주막의 마지막을 지켰던 유옥연 주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가 2007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장날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룻배가 들고나던 삼강나루. 그 옆에서 죽을 때까지 주막을 지키며 고달픈 길손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유옥연 주모 할머니. 그녀는 신분을 초월한 모든 이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허기진 이에겐 국밥을 말아주고 잠자리가 필요한 이에겐 좁은 방 한 칸을 내어 주어 객고를 달래게 했으니…. 소금을 팔러온 보부상이든 과거를 보러 가던 권세 높은 집안의 자제든 주모에게는 다 똑같은 나그네였을 터이다. 그녀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훈장이다.

문득 도선사 공양주였던 J 보살의 한스러운 삶이 떠올랐다. 새벽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스님과 불자들을 위해 정성스레 공양을 지어 올리던 J 보살. 예천 명문가의 종부였던 그녀는 나이를 초월한 나의 오랜 도반이었다. 서울에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하는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 그녀에게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열 살 때였다. 하루는 집에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다. 그녀는 재빨리 광으로 달려가 항아리에 담겨있던 하얀 햅쌀을 정성스럽게 떠서 스님 걸망 가득 넣어 주었다. 스님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을 어디 멀리 양자로 보내세요. 그래야 아버지가 명을 잇게 됩니다.”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라 그녀는 애써 외면했다. 그런데 몇 년 뒤, 남편이 집으로 오던 길에 객사를 한 것이다. 집안의 자존심이자 동네의 자랑이었던 남편은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그녀는 탁발 나왔던 스님을 원망했고 독실하게 믿었던 불교와도 등을 돌렸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건 스님의 말을 듣게 된 아들이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사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와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들 가슴에 맺힌 운명의 굴레를 조금이라도 풀어 줄 것이란 신념 때문이었다. 아들은 뼛속까지 맺힌 원망을 공부로 한풀이를 했고, 명문대에 합격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대학 졸업 후 외국계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된 아들의 첫 근무지는 유럽이었다. 이제는 아들이 홀로 자신의 인생을 헤쳐 나가게 되었으니 자신이 할 일은 다한 것 같았다. J 보살은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하숙집을 정리한 후 도선사로 들어가 공양주가 되었다. 속세와의 연을 끊고 끝없이 공덕을 쌓는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동안 등 돌렸던 부처님께 속죄하는 길이라 여겼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온 정성을 다해 끝없이 절을 하던 보살의 모습에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가만히 주막의 부엌을 들여다본다. 황토로 된 벽에는 지워지지 않은 수많은 금이 빗살무늬 토기에 그려진 무늬처럼 어지럽다. 누군가가 지고 간 외상값을 글을 모르는 주모 할머니가 자신의 방식대로 표시한 외상장부다. 막걸리 한 잔은 가로로 짧은 금 하나, 막걸리 한 통은 긴 금 하나, 외상값을 갚으면 세로줄을 그었다. 할머니가 죽고 난 후에도 이렇게 많은 금이 지워지지 않은 걸 보면 길손들에게 외상으로 밥과 술을 주었던 그녀의 애잔한 마음 씀씀이가 짐작이 간다.

J 보살도 그랬다. 몇 달씩 하숙비를 못 내는 학생에게도 차별 없이 고봉의 밥과 반찬을 해 먹이며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와 힘겹게 공부하는 하숙생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절을 찾는 신도들에게도 늘 넉넉하게 인심을 베풀었다. 다른 이에게 베풀고, 또 베푸는 것이 운명의 실타래를 푸는 길이라 믿었다.

J 보살 49재 날, 그날도 이렇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하던 J 보살 아들은 꿈속에서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기도와 공덕으로 오늘날의 자신이 있다며 눈시울을 적시던 J 보살 아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고향에 묻힌 어머니 산소에 참배하고 오는 길에 꼭 삼강주막에 들러 국밥 한 그릇 먹고 간다는 그. 그는 이 주막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할머니의 삶이 평생을 아들인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만 살았던 어머니와 닮았다고 했다. 빗줄기 속에서 들리던 그의 목소리는 비보다 더 습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비가 그려 놓은 삼강나루 안개 사이로 황포돛배를 젓는 사공의 환영이 보인다. 그의 원망과 그리움이 사공이 젓는 뱃길을 따라 사라지길 기원해 본다. 아니 어쩌면 나의 도반 J 보살은 저승에서도 아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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