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부터/ 잔가지 흔들어놓고// 턱없이 파고드는/ 빛살 고운 아린 몸살// 깊은 밤 하얗게 밝혀도 도도하게 피는 꽃// 한땐 자작나무/ 눈빛 깊던 맑은 바람// 편한 숨 과욕이라며/ 숨길 조여 헐떡이다// 그래도 못다 한 노래 서걱이며 타는 밤// 분주한 꽃길 따라/ 잰걸음 서두르다// 연약한 바람 앞에/ 얼굴 붉혀 송구한 날// 허전한 빈 들에 와서 다시 쓰는 젖은 시

「대구시조 제23호」(2019, 그루)

김세환 시인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7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가을은 가을이게 하라」 「산이 내려와서」 「어머니의 치매」 「깨어 있는 사람에게」 「돌꽃」 등이 있다.

‘언제나 그랬었지’에는 부제로 천식 일기가 있다. 천식은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생기는 외인성천식과 기관지가 민감한 사람에게 세균이 침입해 생기는 내인성천식이 있고 자율신경계의 기능이 잘못돼 생기기도 한다. 폐기관지의 근육이 위축되고 기관지 점막이 부풀어 오르며 기관지 샘에서 점액이 과다하게 분비되면서 이때 나온 점액 때문에 기관지가 막혀 천식 발작 증상이 나타난다. 한 번 증상이 나타나면 한 시간 반에서 몇 시간 정도까지 계속 지속되므로 고통이 큰 병이다.

1970년대 중반 절박하게 겪은 일 중 하나가 천식이었다. 3년 간 천식을 앓으시는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천식이구나, 하고 자탄하곤 했었다. 밤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연해 이어지는 거친 기침은 전신을 쥐어뜯듯 옥죄었다. 온몸의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천식 일기까지 시조로 쓰게 됐을까? 좀체 떠나갈 줄 모르고 몸을 괴롭히니 그것을 이기는 방도로 천식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어쩔 수 없다면 동행해야 한다. 다만 늘 조심하고 잘 통제하면서 그 기세를 면밀히 방어하는 길밖에는 없다. 요즘은 워낙 의학이 발달해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잘 따르기만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가을 초입부터 잔가지 흔들어놓고 턱없이 파고드는 빛살 고운 아린 몸살, 이라고 천식을 두고 노래한다. 함께 한 세월이 짧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또한 깊은 밤 하얗게 밝혀도 도도하게 피는 꽃, 이라고 하니 화자의 넉넉한 마음씨가 그대로 잘 드러나고 있다. 한때는 자작나무 눈빛 깊던 맑은 바람이었고, 편한 숨 과욕이라며 숨길 조여 헐떡이기도 했다. 그래도 못다 한 노래 서걱이며 타는 밤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분주한 꽃길 따라 잰걸음 서두르다 연약한 바람 앞에 얼굴 붉혀 송구한 날에 시의 화자는 마침내 허전한 빈 들에 와서 다시 젖은 시를 쓰고 있다. 제목 ‘언제나 그랬었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늘 흔들림 없이 살며 천식조차도 때로 벗 삼아 동행하면서 삶을 영위하겠노라는 다짐 같은 것을 시의 행간 곳곳에서 읽는다. 사뭇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아와 세계를 관망하면서 내면을 다독이는 화자의 모습에 따사로운 눈길을 보내고 싶다.

빛살 고운 아린 몸살과 도도하게 피는 꽃, 눈빛 깊던 맑은 바람과 다시 쓰는 젖은 시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보듬어 안으며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점에 신뢰가 간다.

이제 가을이 깊어져서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목덜미에 차다. 이리저리 떨어져 흩날리는 잎들이 스산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한 마음으로 만추의 단풍 길을 걸으며 소소한 행복을 고이 지켜갈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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