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이 가을에

발행일 2020-10-14 10:07: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인생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엮어지는 드라마를 닮았다. 그때 그 사람을 또는 그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되어 있을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와 같은 만남을 그저 운명이라고만 치부해 버리고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병주의 ‘허망과 진실’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1979년 가을 나는 병상에서 상, 하 두 권을 단숨에 독파했고, 이후 몇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꺼내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읽어 본다. “허망 그 자체가 진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허망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곤 어떤 진실도 붙잡을 수가 없다.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허망을 배운 사람은 이미 지옥을 보아버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허망을 뚫고 찾아낸 진실만이 지옥을 견디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란 인식이 굳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런 구절을 보면 호흡이 빨라지고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린다.

니체 편에 줄 친 부분도 다시 읽어본다. “사람은 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강물은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 이병주가 뽑아낸 차라투스트라의 이 말을 몇 날 며칠 되씹고 곱씹기도 했다. “바다가 된 사람이면 초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너무 좋아 홀로 감포 앞바다를 찾아갔던 일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고동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어떤 사람은 잠시 만나 공원의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나눈 사이밖에 안 되지만 생각할수록 가슴 저리고 간절히 보고 싶다. 위대한 열정, 위대한 정신의 만남은 인류사와 문화예술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독일 헌법의 도시 바이마르에는 위대한 예술가의 우정도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는 1788년 어느 부인의 집에서 처음 대화를 나눴다. 이 만남을 통해 괴테는 궁핍한 생활을 하던 실러에게 예나 대학 역사학 교수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그후 어느 학술대회에서 만나 우연히 함께 길을 걸으며 장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의 학문적 공통점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자연과학의 세분된 연구 방법에 반대하고 통합적인 연구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자연을 어떻게 재현할지에 관한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괴테는 현실적인 체험에 근거해 자연을 재현할 수 있다고 봤다. 실러는 이념에 근거해 자연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서신과 방문 대화를 통해 서로 격려하며 문학적 공동작업을 진행했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독일 고전주의는 무르익게 된다. 1799년 실러는 예나를 떠나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로 옮겼고, 이때부터 찬란한 ‘바이마르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두 사람은 독일예술의 중심인 바이마르 극장을 공동 운영하면서 작품 선정과 각색 논의 등을 같이 진행했다. ‘빌헬름 텔’은 폭정에 저항한 스위스의 독립운동 이야기인데 괴테의 권유로 실러가 썼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혼자일 때 가장 강합니다.” 이 구절은 아직도 내 머리와 가슴에 온전히 남아 삶의 고비마다 내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게 한다. 1805년 실러가 45세로 세상을 뜨자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생산적인 협력은 끝나고 독일 고전주의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현재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는 괴테와 실러가 마주 손을 잡고 있는 동상이 있다. 어떤 사람이 괴테에게 "당신과 실러 중에 누가 더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더 위대한 어느 한 사람보다는 누가 더 위대한지 모르는 두 사람이 있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요?"라고 괴테가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생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엮어지는 드라마’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 단테와 베아트리체 같은 운명적인 만남은 어렵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면서도 사람보다 더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 먹고 손을 뻗기만 하면 도처에 좋은 책이 있다. 책은 행복감을 높여주고 술과 담배를 줄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책을 잡자. 좋은 책은 이 풍진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삶의 등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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