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협대표작선집1」 (대구문인협회, 2013)
몰락에 끌려 바닷가를 찾는다. 몰락은 앞을 막아서고 숨을 틀어막는다. 몰락이 바다로 이끄는 것은 끝장을 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기실은 몰락의 수용이 기다릴 뿐이다. 바다는 몰락을 받아들여서 한 몸이 되게 한다. 몰락을 받아들인 마음은 편안하다. 모두 다 포기하고 내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피해 다니기만 한 일이 바보스럽다. 그냥 담담하게 수용하고 내려놓으면 이기는 일인데 공연히 억지를 부리며 뿌득뿌득 축축하게 살아 왔다. 바다에게 배운 지혜다.
시야가 탁 트인 바다를 보노라면 가슴이 뻥 뚫리고, 밀려오는 파도가 세상사의 번뇌를 확 쓸어간다. 바다의 푸른 빛깔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친구처럼 말을 걸어오는 갈매기는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을 몸으로 보여준다. 바람이 싣고 온 개펄 내음과 마음 없는 파도소리가 험한 세파에 찌든 몸을 말끔히 씻어주고 삶에 멍든 마음을 치유시켜준다. 바다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영혼을 포맷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포말로 부서지며 언제나 물안개에 싸여 있지만 바다는 생을 감싸줄 수 있는 눈치 빠른 존재다. 바다는 누구나 편하게 쉴 수 있는 여인숙이다. 온다고 해서 간을 내어줄 듯 간드러지게 맞지도 않고, 간다고 해서 말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바다여인숙이 좋다. 관심이 없는 듯, 뱃고동같이 퉁명한 배려가 오히려 매력이다. 숙박계는 비록 허술해 보이지만 바다 사정엔 손바닥 보듯 훤하다. 갈매기의 움직임, 일출과 일몰에 대한 정보도 빠삭하다.
바다여인숙은 열쇠가 없어도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로운 휴식처다. 바다가 보이는 창에서 지평선을 보며 파도소리와 함께 잠들 수 있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몰락은 그 자취를 감춘다. 어두운 바다에는 등대의 불빛이 살아있고 아름답게 몰락했다가 무던하게 일어나는 달빛이 가슴 속에 와 닿는다. 어두운 새벽까지 희망의 등대가 마음을 비춰준다. 밤새도록 바다가 살갗을 파먹고 온몸을 삼켜도 아프지 않다. 태양이 떠오르고 달이 사라져도 시인은 청명한 달빛을 무심하게 지켜본다. 몰락이면 어떤가. 홀랑 벗은 채 원초적 상태로 또 다른 아침을 맞는다. 오철환(문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