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종일 먼 허공을 지나는 바람처럼// 살다가 오늘 떠나는 이별 마찬가지다// 니는 오래 살아라 그 말 깨우치듯// 아무 말 없이도 열 번 백번 쌓는// 목소리 파헤쳐 봐도 바람 소리 뿐이다

「설산」 (2020, 한빛)

경북 안동 출신 조영일 시인은 1975년 월간문학과 시조문학 추천완료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바람 길」 「솔뫼리 사람들」 「마른 강」 「시간의 무늬」 「설산」 등이 있다. 그는 내용과 형식 사이에 상존하는 긴장과 상충을 감안하면서 견고한 양식적 미덕 속에서 완미한 정형미학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근원 지향의 시정신과 공동체적 사유의 결속 과정을 추인한다. 그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유성호 평론가의 평가다.

나이가 들면 더욱 쓸쓸해진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연륜이 깊어질수록 젊음이 부러워진다.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고 만남의 자리가 꺼려지기도 한다. 물론 노익장들도 많다.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열정적으로 사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

진실로 사람의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 맞다. 종일 먼 허공을 지나는 바람처럼 살다가 오늘 떠나는 이별 마찬가지다, 라는 화자의 말에 수긍이 간다. 너는 오래 살아라 그 말 깨우치듯 아무 말 없이도 열 번 백 번 쌓는 목소리를 파헤쳐 봐도 바람 소리 뿐인 때를 화자는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그냥 목소리를 듣지 않고 굳이 파헤쳐 본다는 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기 때문이다. 제목 ‘김원각 시인’에 등장하는 시인은 친한 벗이다. 몇 해 전 타계했는데 이 시편은 그를 기리고 있다. 동도의 길을 걸으며 오랫동안 교유한 문우가 일찍 떠나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이 곡진하다. 진실로 종일 먼 허공을 지나는 바람과 살다가 오늘 떠나는 이별은 서로 부딪쳐서 또 다른 울음소리를 낼 듯하다. 생로병사의 길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슬프다. 애잔한 심사를 달랠 길이 없다. 더구나 낙엽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월 말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열정을 품은 시인은 또 한 권의 시집을 엮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삶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귀중한 정신의 소산인가? 복된 삶이 아닐 수 없다.

붓을 들어 자아와 세계의 갖가지 문제를 심도 있게 시화하는 일은 필생의 업이다. 좋아서 하고 있는 일이다. 말 못할 고뇌와 더불어 환희의 시간도 적지 않다.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삶의 진가를 맛보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일을 하는 시인으로서는 모국어가 고맙고 함께 하는 이들이 고맙고 일이 있어 고마운 것이다. 열정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이상 인생은 더욱 애틋하고 각별해진다. 또한 두근두근하는 설렘을 간직하고 있어서 삶을 추동하는 힘을 얻는다.

이번 시조집의 표제작 ‘설산’을 보자. 능선 너머에서 오는 바람이 찬 날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는 날개를 펼치고 은빛의 차디찬 한낮 빙벽으로 서 있는 설산을 바라본다. 설산은 푸른 결기 음각한 팻말 둘러치고 한파 속에서 흰 뼈마디 드러낸 준엄한 적요의 표상이다. 그래서 절필의 막막함을 엿본다. 백지가 펄럭인다는 것은 글쓰기의 먹먹함과 막막함이 함께 클로즈업 된 장면이다. 점점 절필의 날은 가까워오는데 설산 앞에 서니 갖가지 소회가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오면 가야하고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길이 인생이다. 가을이 쓸쓸하다 해도 따사롭게 내리는 볕살이 있어 밝고 환한 마음을 보듬을 수 있다. 곱게 나이든 분들을 만날 때면 닮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한 사람의 굴곡진 궤 적이 얼굴에 다 나타난다.

또다시 시작되는 하루, 한 편의 시와 함께 했으면 한다. 그렇기에 시인은 늘 붓을 촉촉이 적셔둘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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