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발행일 2020-10-27 08:38:3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도심에 있다 보면 문뜩 시골 경치가 주는 포근함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의 연속인 요즘 같은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

매년 이맘때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며 한가로이 자연의 향기를 느끼는 시간을 갖지만 올해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해 반쪽짜리 가을이 됐다.

그래도 가을이 주는 편안함을 느끼고자 천년수도 경주를 선택했다.

경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옛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인 ‘양동마을’을 찾았다.

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에는 수많은 고택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송첨종택’을 방문했다.

‘경주 손씨’의 대종가인 송첨종택은 조선시대 전기의 옛 살림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곳은 대종가들의 명맥을 잇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꼽히며,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이다.

송첨종택은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해 건축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높다.

이곳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인 ‘양민공 손소’가 1459년(세조 5년)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이라고도 한다.

특히 손소의 아들인 손중돈 선생(조선전기 이조판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과 외손인 이언적 선생(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그의 주리적 성리설이 퇴계 이황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됨)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양동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송첨종택은 현재까지 경주 손씨의 후손들이 거주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양동마을의 가장 오래된 곳, 세 현인을 기다리다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 온 양민공 손소는 마을 내 처가에서 살다가 ‘송첨종택’을 짓고 분가했다.

손소는 경북 청송 출신으로 ‘풍덕 류씨’ 류덕하의 사위로 경주 양동에 정착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혼인을 계기로 처가로 이주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양동마을의 역사 해설사들에 따르면 이 당시 재산 상속의 구조가 ‘장남’ 중심이 아닌 형제‧자매에게 모두 배분되는 형식이라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균등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임진왜란 후부터는 맏이 중심의 상속제도가 강화되는 사회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

전쟁이나 질병 등이 창궐하게 되면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양동마을 사람들은 송첨종택 터가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지역 최고의 명당으로 여겨 왔다.

송첨종택은 삼현지지(세 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라 해서 세 분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두 현인(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은 이미 태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세 번째 현인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손소의 딸이 친정에 와서 낳은 아들인 ‘이언적’은 종묘와 문묘에 함께 배향된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라 불린다.

동방오현(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유학자로서 이언적, 이황,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한 사람으로서 후대의 추앙을 받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속설에 의하면 세 번째 현인을 만들고자 ‘경주 손씨’ 중 시집을 간 후손들이 송첨종택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그렇게 양동마을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임신을 하고도 아닌 척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마을 밖 초가를 내어 딸을 재웠다고 한다.

◆서백당과 향나무, 송첨삼보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 종택의 당호(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 인명을 대신해 부르는 호칭)다.

송첨종택의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송첨은 양민공의 호이다.

서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물 중 하나다.

사랑채는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서백당은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 한 쪽으로 둬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통로가 마루 형식으로 돼 있는 것도 특이하고 사랑채 주변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은 송첨종택이 전체적으로 ‘서남향’이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살림집에서는 절대 방위보다 상대적인 방향을 중시했다고 한다.

이에 정침(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의 오른쪽에 사당을 두는 제도를 따랐고 대문간도 문채의 정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과 의식 공간을 가르는 경계점에 위치한다.

대문간과 서백당, 사당으로 이어지는 외래의 동선이 맞아 떨어져 삼위일체(세 가지의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통합되는 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서백당 주변에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림집도 있었다고 한다.

서백당은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가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

이 당시 찰스 황태자를 만났던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저녁 늦게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급하게 들어서인지 황토를 깔고 청소하며 분주했던 기억이 있다”며 “오래 전 일이지만 ‘경주 손씨’ 문중에는 찰스 황태자와 찍었던 사진이 가보(?)처럼 걸려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서백당 앞 마당에는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

양민공 손소가 송첨종택을 짓고 이를 기념해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원줄기가 자상 90㎝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 그 뒷부분이 위로 자라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사람도 작게 보일만큼 그 위세가 대단해 멀리서 보면 마치 분재를 보는 것 같은 형상이다.

이 밖에 송첨삼보라는 것이 있다.

손씨 종가가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 세 가지 보물로 연적과 장도, 갓끈이다.

용 모양의 연적은 옥으로 만들어져 있고 장도의 뚜껑은 상아에 용이 새겨져 있다.

갓끈의 재료는 산호로 돼 있어 산호영이라 불리고 있다.

이 세 물건 모두 세조가 공신인 손소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살림집의 역사를 보여주다

송첨종택은 집 전체가 경사지에 맞춰 뒤가 높고 앞이 낮은 배산임수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송첨종택은 물(勿)자 모양의 양동마을에서 제일 위쪽 골짜기인 ‘안골’의 깊숙한 곳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송첨종택의 중심은 일자형 대문채 뒤로 ‘ㅁ’자형의 몸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므’자형 모양을 이룬다.

경사가 급한 땅에 있어 몸채와 행랑채 사이의 공간이 좁고 몸채의 경우 앞면과 뒷면 사이의 높이 차이가 커 정면에 놓인 사랑채의 하부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송첨종택 안에서 바라 본 주변 모습은 선조의 멋을 엿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

정면은 계곡의 맞은 편 봉우리에 가로 막혀 있지만 사랑채 옆면은 양동마을의 안산(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인 성주봉을 마주 대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과 방향을 달리 한 것은 경사지에서의 지세(땅의 생김새)와 안대(집이나 묘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를 둘 다 만족시키려는 해결책으로 보인다.

송첨종택의 몸채(여러 채로 된 살림집에서 주가 되는 집채) 뒷부분 지붕의 처마 높이는 양 날개채 부분의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높이와 같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한 탓에 몸채에서 뒷부분 몸통을 이루는 지붕과 중간부의 양쪽에 있는 날개채 부분, 앞부분의 지붕이 서로 다른 높이로 이어져 있다.

이는 지붕의 높이를 한 단씩 내리는 방법으로 영남지방의 살림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조다.

송첨종택은 대칭형 안채로 구성됐고 공간의 구성이 검소하고 간결했다.

대칭형 안채는 서울과 경기 지역의 상류층 살림집에서 사용된 형식인데, 이것이 영남의 사대부 살림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기(氣)’에 비해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의 살림집 계획 방법이라는 속설도 있다.

이는 실용성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일까.

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 한옥 구조와 달리 송첨종택 등 양동마을의 집은 모두 원리원칙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반‧상의 공간, 내‧외의 공간, 종손‧지손의 공간이 구별되고 영남학파의 전통을 잇고 있어 집의 구조도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의 향기를 품은 채 100여 호가 넘는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들어선 양동마을에서 송첨종택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내가 바라 본 송첨종택은 그 당시 경북지역의 양반 가옥 형태를 가장 잘 표현해 낸 건축물이었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 전통 가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동마을의 ‘송첨종택’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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