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원
▲ 서예원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

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

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히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돌 몸통에 끝까지 붙들어두어 잃지 않았던 글씨들 덕분에, 마침내 그 가치를 증명해 내기에 이르렀다.

석비는 모든 수고로움을 의연히 견뎌내어, 새로운 시대에 빛을 보았다. 당대에는 이름 없는 비석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에는 과거 신라의 역사와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에게 ‘울진 봉평리 신라비’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신라 법흥왕 시대에서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그렇게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새겨진 기록은 단순하지만 그 기록이 말해주는 당시 시대상 덕분에, 이 석비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신라시대 비석들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중에는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세운 비석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진흥왕이나 법흥왕처럼 왕으로 태어나 특별한 업적을 세우며 살진 않았을 테니.

울진 봉평리 신라비도 그 관심의 일부였다. 석비 발견 계기를 읽고 그 보존도 단순하게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전시관이 있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안에는 고비(告碑)와 함께,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을 특종으로 다룬 옛 신문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획기적 사료라는 헤드라인에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떨림이 전해져왔다.

신라 법흥왕 때 울진 지역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이들에 대한 처리와 형벌에 대해 회의하고 형벌을 집행한 내용이다. 현대로 치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석비를 통해 그 시대의 그 삶을 본다. 그 시절에도 제도를 갖추고 법을 집행하면서 온전한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본다. 다시 돌 위에 간신히 남아 매달려 있는 글자들을 보았다. 바람과 물과 시간이 앗아가려 한 과거의 삶이 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엄숙해졌다.

전시관 안 중앙에 보존되어 서 있는 그 위용을 한참 바라보았다. 발견된 날짜를 생일로 하면, 나보다 10개월 늦게 태어난 석비였다. 4면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땅 위에 제힘으로 온전히 발붙이고 서 있기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중심은 잘 유지하고 있었다.

감탄이 나왔다. 종이는 찢어지고 물에 젖고 불에 타서 영속성이 떨어진다. 돌은 다르다. 엄청난 충격으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 이상, 제 모양을 유지한다. 오죽하면 바람도, 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천천히 돌의 표면에 흠집만을 내지 않던가.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비석도, 문명도, 참으로 위대하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글자라는 도구로 천 년 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살던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어. 거기는 어때?’

바람은 불고, 물은 흘러갔다. 사람은 생과 사를 반복하고, 시대는 변해왔다. 높이 204㎝의 공간에 거벌모라의 숨결을 그대로 담은 채, 비석은 그 오랜 생을 달려온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

우리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도 바로 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1천500년을 살아낸 이 비석 덕분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인 결과이며, 결국 역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신라인들도 우리보다 조금 일찍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 뿐. 결국 우리는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고 삶과 애환을 공유하는 같은‘인간’임을, 이 석비(石碑)를 통해 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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