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인생의 가을에는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정명희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물을 주느라 채소밭에서 한동안 서 있곤 했는데 그 수고를 덜게 됐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앉아 여유롭게 가을의 정취를 느껴본다. 연분홍 코스모스가 창공을 배경으로 하늘거리고 바늘꽃이라 불린다는 가우라 꽃이 키를 한껏 높여 정원 울타리를 넘실거리며 가을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하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마당에 심은 목화는 활짝 펴서 말끔하게 씻긴 산의 모습을 포근하게 덮어 줄 것 같다.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던 활짝 핀 꽃들도 머지않아 겨울 채비를 하러 불쑥 떠나버리게 될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 영원히 기억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겨두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말이다.

채마 밭에 심은 배추를 올해는 묶어주지 않았다. 농사에 일가견 있다는 교수님께서 자연은 자신을 스스로 간수하는 힘이 있어서 굳이 묶지 않아도 어느 정도 숙성돼 속이 차고 기온이 내려가면 스스로 오므려서 자기를 보호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일부러 불편하게 사람이 힘을 들여 동여매 줄 필요가 없다는 조언을 주셨다. 어떤 결실을 볼까. 호기심이 일어 올해는 그냥 배추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서 자신은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연 상태로 두고서 바라보기로만 하기로 정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 살아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잊고서 자꾸만 옆에서 보호한다고 오히려 그 힘을 잃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싶어서다.

지난달 은퇴 경기를 한 축구선수 이동국에게 보냈다는 그의 아내의 편지가 잔잔한 감동을 일게 한다. “슈퍼맨 아빠, 아프다고 말해도 돼요” 미스 하와이 출신으로 이십여 년 전 결혼한 그의 아내는 그동안 여러 아이를 낳아 키우며 남편을 내조해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그 축구 선수의 얼굴을 보면서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동국은 ‘아내가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 영화 찍고 있다고 생각하자. 엔딩이 중요한데 마지막에 꼭 웃자’고 위로해줬다고 털어놓았다. 정말 그녀의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영화의 한 장면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정말 짜놓은 것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던 그의 마지막 경기, 그곳에서 우승하고 은퇴하는 순간에 그가 있다면 정말 해피엔딩이지 않겠는가.

이동국의 아내가 쓴 편지는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전한 모양이다. 글을 쓰는 지인이 보내준 문구에는 “자신이 페널티킥을 성공하지 못해 팀이 패했을 때도, 경기가 끝나기 바로 전 굴러들어 온 공이 빗물에 미끄러져 골인하지 못해 평생 먹을 욕을 다 먹던 순간에도, 그게 동료선수가 아닌 자신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는 당신,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 말들을 다 들어야 했던 사건 속에서도, 동료선수를 지키려고 입을 꾹 다물고 지금까지 다 안고 가는 당신. 후배들이 자신보다 더 오래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선수생활 할 수 있게 길을 잘 닦아놔야 한다며 지금껏 뛰어온 당신,//…중략…// 슈퍼맨 아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요.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들도 이제 그만 다 내려놓아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함께 오랜 시간 상상해온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해피엔딩 순간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많은 사람이 운동을 좋아하고 선수들을 좋아하고 또 알콩달콩 살아가는 그들의 가정생활을 지켜보는 것을 즐기고 있으리라. 열심히 운동하고 재미있게 생활하며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가 은퇴하는 날, 눈물 머금고 울먹이던 그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한때 한참 떠돌던 유머가 생각난다. “우리 인생에도 등급이 있다”는. ‘남자 1등급은 능력도 있다. 2등급은 인물은 있다. 3등급은 돈은 있다. 4등급은 성질만 있다’라고 한다. 반면 여자 1등급은 ‘마음도 곱다. 2등급은 얼굴은 예쁘다. 3등급은 요리는 잘한다. 4등급은 바람만 들었다’라고 하던가.

축구 선수 아내의 편지가 정말 곱고 다정해 보인다. 요즘처럼 출산율이 걱정인 세상에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자식을 다섯이나 낳아서 키우고 있으니 1등급 애국자로 칭송받을 만한 여인이지 않은가. 어느 것 하나 미운 구석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의 아내가 이렇게 절절한 편지로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을 보니 축구선수 이동국은 정말이지 1등급 남편이었던 것 같다. 축구선수로서 그를 사랑했던 팬들도 마음 흐뭇할 것 같다.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우리네 인생도 점점 깊어갈 것 같다. 우리들 인생의 가을에는 어떤 아름답고 멋진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