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읽는 묵직한 울림의 인문학 서적

발행일 2020-11-04 08:05:4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길가 가로수들이 단풍잎을 하나둘씩 떨구며 이 가을도 절정으로 내달린다. 가끔씩 불어오는 휑한 바람에 마음 한 곳이 공허해 질 때 가슴 가득 묵직한 울림을 주는 새로 나온 인문학 서적으로 온기를 채워보자.

나혜석의 말
◇나혜석의 말/나혜석 지음/조일동 엮음/이다북스/272쪽/1만4천500원

서양화가이자 문학가로서 근대 신여성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나혜석의 글들을 묶은 ‘나혜석의 말’이 이다북스에서 출간됐다.

이 책에는 19살 때 쓴 ‘이상적 부인’에서 1923년 ‘모(母) 된 감상기’, ‘이혼 고백서’(1934년), 그리고 41세 때 쓴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까지 14편을 실었다.

나혜석은 이 책을 통해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치며 자립적인 한 인간으로 당당히 서고자 했던 그의 삶을 읽을 수 있으며, 남성 중심적 사고로 여전히 고통 받는 우리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촉망받는 화가이자 작가였지만 시대는 그에게 아내, 며느리로서의 삶을 살라고 강요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신여성’이 붙고 시대와의 불화가 함께한다. 남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출세하려 하지 않았고, 아내이자 어머니였지만 인형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그는 경직된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깨어 있고자 했으며,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삶은 시대와 어울리지 못했고, 시대는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며,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워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재능은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18년에 조혼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을 비판한 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작가로서도 남다른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지금 나혜석은 화가와 작가이기 전에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이자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은 인형이 아닌,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고자 한 바람이자 실천이었다.

저항하는 지성, 고야
◇저항하는 지성, 고야/박홍규 지음/들녘/392쪽/1만5천 원

‘저항하는 지성 고야’가 들녘에서 출간됐다.

이 책의 제1장은 서론 또는 총론 격으로 스페인 문화와 역사, 스페인 지방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시작해, 고야 시대까지의 스페인 역사와 스페인의 지역적 특성을 소개한다.

본론에 해당하는 제2, 3, 4장에서는 고야의 삶과 예술을 시대상황 속에서 추적한다.

제2장은 스페인 미술을 소개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스페인 미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저자에게 고야는 어떤 의미인지로 시작해 고야의 출생, 출세의 시기, 카를로스 3세 시기의 개혁과 진보와 반동의 역사를 다룬다. 또한 초기 칼톤과 함께 종교화, 초상화, 자화상을 소개한다.

제3장은 고야에게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위기였던 세기말을 다룬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고 청각을 상실했을 때의 작품 활동을 소개한다. 또 ‘로스 카프리초스’에 실린 작품들과 함께 그에 담긴 사상도 같이 소개한다.

다음 제4장에서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침략으로 이어지는 제2의 비극과 전쟁 속의 고야에 대해 다룬다.

1810년대의 유화들과 전쟁을 바라본 고야의 시각 그리고 판화집 ‘전쟁의 참화’에 대해 소개한다. 이어 1814년, 고야는 5월의 그림들을 그린다.

고야는 민중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역사화를 등장시켰다. 전쟁 그 자체의 현실을 그린 것이다. 후기 작품에서는 ‘이단심문소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종교나 권력의 풍자 및 권위에 대한 조롱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판화집 ‘투우’에서는 그가 사용한 다양한 기법들은 물론 작품에 투사한 자신의 운명과 예술가의 사명도 알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만년에 그린 ‘검은 그림’들은 그의 내면세계를 온전히 드러낸 작품들로 삶과 욕망, 권력에 대한 비관, 환멸, 회한에 대한 고발이다. 이어 고야가 사후에 재평가되기까지의 이야기들로 마무리한다.

마지막 제5장에서 고야 사후의 스페인 정치 및 문화, 교육, 사회적 상황에 대해 검토하며 스페인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로 만나는 송계
◇이야기로 만나는 송계/김정식 지음/보고사/311쪽/1만5천 원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송계 한덕련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책 ‘이야기로 만나는 송계’가 보고사에서 출간됐다.

송계 선생의 삶과 학문을 이야기 방식으로 엮은 책으로, 실존 인물 송계의 행적이나 일화를 바탕으로 저자의 상상을 덧붙여 재조명했다.

조선이 쇠락해 가던 격변기에 태어나 국권을 상실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광복 등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한평생 유학자의 길을 걸었던 송계 선생의 고뇌와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말 영남 동부 지역의 마지막 유학자요 실천 도학자인 송계 선생은 군위의 화산, 산성과 영천의 임고에서 학당을 열고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세심시동지’를 비롯한 1천여 편의 유학적 시와 문적을 남겼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됐다.

제1부에서는 장례식을 마치고 귀후재에서 송계를 추모하는 이야기로 시작해 송계의 삶에 안겨진 고민과 갈등을 다뤘다. 유학이 쇠퇴해져 가는 사회 변동을 겪으면서 송계는 자신이 선택해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그 위에 자신의 목표를 설정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2부에서는 앞에서 던져진 고민의 해법을 찾기 위해 떠나는 긴 여정에서 도산서원 등에 깃든 선현들의 영혼은 물론 부안의 전간재와 거창의 곽면우를 비롯한 여러 도학자와 만나 학문적 소통을 하며, 그 과정에서 송계가 사색하고 직간접으로 깨달은 바를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제3부는 순례를 통해 결심한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다. 순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도학 교육의 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송계 자신의 교육정신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이 책은 인물과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함께 여정하며 감정이입하게 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 풀어낸 이야기로, 당파를 초월한 송계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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