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인 차전놀이||













▲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이자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차전놀이가 열리는 모습.
▲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이자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차전놀이가 열리는 모습.




전국 지역별로 대표적인 전통문화놀이가 있다.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에서는 다양한 전통놀이가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인 차전놀이와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놋다리밟기이다.

차전놀이와 놋다리밟기는 안동은 물론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전통문화놀이로 꼽힌다.





◆차전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차전놀이는 고려 태조 10년(927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고창성(지금의 안동시)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차전놀이 유래

당시 후백제의 견훤군과 고려의 왕건군은 고창성 일대에서 대격돌을 벌였는데, 이때 고창성의 지배적 호족들인 김선평, 권행, 장길이 주민들을 이끌고 왕건군에 가담해서 큰 공을 세웠다.

견훤이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이루자 신라를 멸하고 여세를 몰아 고창성으로 진격했을 때 당시 세 사람은 왕건군에 가세했다.

이들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임을 알고서 많은 소금을 낙동강에 푼 뒤 주민 전체가 단결해 인해전술로 견훤군을 강물로 밀어붙이게 해서 견훤군을 참패시켰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차전놀이의 유래담이다.

이로 인해 왕건은 고려를 창건했고 김선평, 권행, 장길을 개국공신으로 여겨 태사에 봉하고,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며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안동 사람들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차전놀이를 전승해 왔으며, 1969년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급회’가 설립되고 안동 차전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





▲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이자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차전놀이가 열리는 모습.
▲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이자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차전놀이가 열리는 모습.


△차전놀이 놀이법



먼저 부정을 타지 않게 정성껏 베어 온 길이 20∼30척의 참나무를 X자 모양으로 묶어 동채를 만들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다음, 가운데에 판자를 얹고 위에 방석을 깔아 동여맨다.

동채 머리에는 고삐를 매어 대장이 잡고 지휘할 수 있게 하고 판자 뒤에는 나무를 X자 모양으로 만들어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

동채꾼은 대장·머리꾼·동채꾼·놀이꾼으로 이뤄지며 대체로 25~40세의 남자 500여 명이 동서로 갈리어 팔짱을 낀 채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내며 승부를 겨룬다.

동부의 대장을 부사(府使), 서부의 대장을 영장(營將)이라고 하며 승부는 상대편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으면 이긴다.

이때 승리한 쪽에서는 자기가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로 던져 올려서 기쁨을 표시하기도 한다.





▲ 차전놀이 전수교육관의 전경.
▲ 차전놀이 전수교육관의 전경.


▲ 차전놀이 전수교육관의 내부 모습.
▲ 차전놀이 전수교육관의 내부 모습.




△차전놀이 전수교육관



매년 9월말 개최되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축제에 차전놀이보존회에서 차전놀이의 시연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차전놀이 전수 교육관은 안동탈춤공원 내에 있다.

전수교육관은 2006년 건립됐으나 그동안 공간이 협소해 전수교육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지난 7월 기존의 공간을 증축하고 리모델링해 1층에는 차전놀이의 역사와 유래, 체험실, 차전놀이용 동채를 실물로 전시했고, 벽면에는 차전놀이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2층에는 차전놀이 홍보 영상실을 만들었다.

영상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천1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상무정신이 깃든 차전놀이를 체계적으로 홍보하고 보고 배우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개관시간은 하절기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동절기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공휴일과 주말은 개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동놀이인 안동차전놀이가 1천여 년을 이어 올수 있던 저력은 지역민들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 깊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밟기의 모습.




◆놋다리밟기(경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

놋다리밟기는 안동지방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 마을 중심으로 부녀자들이 동부와 서부로 나눠 놀았던 안동의 대표적인 여성 대동놀이 이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7호이다.

음력 정월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며, 동교(銅橋)·기와밟기·인다리(人橋)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놀이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세시기’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놋다리밟기 유래





놋다리밟기의 유래담은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길을 떠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개성을 떠나 문경새재를 넘어 예천을 거쳐 송야천의 나루에 이르렀다.

이 나루를 건너야 안동에 들어오게 되는데 물이 불어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다.

이 때 마을 부녀자들이 나와 개울에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놓아 왕후와 공주가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너가게 했다.

부녀자들이 인다리를 놓아 왕비와 공주를 모신 것이다.

왕 일행은 안동을 지나 경주로 피난할 예정이었으나 홍건적이 문경새재를 넘어오지 않았고 안동의 인심이 후해서 안동에 머무르다가 다음해 봄에 개성으로 환궁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안동에서는 새해를 맞이해 상원(上元)날 저녁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모여 놋다리놀이를 하게 됐다고 한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안동으로 피난을 떠난 일은 역사적 사실이다.

1361년(공민왕 10) 11월19일에 궁궐을 떠나 한 달 만에 안동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연말연시의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놋다리놀이의 기원설과 일치한다.

그리고 왕이 공주를 데리고 피난을 왔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공주는 노국공주(魯國公主)로 해석된다.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놋다리밟기 역사

놋다리밟기의 내용을 보면 ‘동국세시기’에 기록된 것과 오늘날 전승되는 것이 거의 비슷하다.

정월대보름이 가까워지면 소녀들이 ‘아기놋다리’를 시작했고, 대보름날 밤에 100여 명의 부녀자가 한마당에 모여 본격적인 놋다리놀이가 벌였다.

평상시에는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상원날 밤에는 이 놀이를 위해 많은 부녀자가 모이는 것이 관습으로 돼 있다.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 경북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놀이인 놋다리 밟기의 모습.




△놋다리밟기 놀이법





모두 허리를 굽히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고 얼굴을 앞사람의 궁둥이에 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다.

이러한 모습을 ‘동국세시기’에서는 ‘물고기를 꿴 형상’과 같다고 했다.

허리를 굽힌 수많은 사람의 열이 이뤄지면 7~8세의 어리고 예쁜 소녀를 공주로 뽑아 곱게 입혀 등 위에 올려놓고 열 뒤에서 앞으로 천천히 밟으며 걸어가게 한다.

이는 마치 다리 위를 걷는 모습과 같다.

이때 공주가 쓰러지지 않도록 양옆에서 한 사람씩 손을 잡아 부축을 한다.

부축하는 사람의 옆과 뒤에는 놋다리노래를 하는 장년 여인들이 서서히 따라온다.

공주가 등을 밟고 지나가면 그 여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행렬의 맨 앞에 가서 다시 허리를 굽힌다.

이렇게 되풀이하기 때문에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행렬의 맨 앞에나 공주의 주변에는 ‘창립(創笠)’이라 해 친손자와 외손자를 둔 관록이 있는 할머니들이 따른다.

노래는 창립이 선창으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뒤에 따르는 사람이 받는 소리를 하는데, 매우 느린 가락으로 부른다.

이 놀이는 여인들끼리만 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남성의 접근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가 남성이 접근하거나 희롱을 하게 되면 창립이 나서서 따귀를 때리고 욕을 하는 등 망신을 주고 쫓아낼 수 있다.

창립에게는 이러한 권한이 부여된다.

친손자와 외손자를 뒀다는 것은 여인으로서 할 일을 모두 해서 권위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권위 있는 여성이기에 남성도 견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놀이의 진행법은 같은 안동에서도 성 안쪽과 성 밖과는 차이가 났다고 한다.

놀이의 행렬이 어쩌다가 다른 마을의 놋다리놀이 행렬과 마주칠 경우 성안에서는 서로 의좋게 비켜서 지나가는 반면에, 성 밖의 변두리에서는 서로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꽃게싸움’이라고 한다.

놋다리놀이는 경북 의성과 전북 정읍·임실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는 기와밟기와 방법과 노래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의성의 기와밟기는 격렬한 싸움으로 승부를 내는 것에 비해 놋다리밟기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 놀이는 오랫동안 전승돼오다가 1910년경 무렵부터 쇠퇴해 거의 중단된 상태에 있었으나 근래에 복원돼 경북도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놀이의 특징은 신앙성이나 승부가 결부되지 않은 여성들만의 순수한 집단민속놀이라는 점이다.

안동놋다리밟기보존회 회원 100여 명이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축제기간 중 놋다리놀이를 선보이고 있다.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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