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1570)의 수제자는 누구인가. 이는 1620년(광해군 12) 당시 서애 류성룡(1542~1607)과 학봉 김성일(1538~1593) 두 문중의 후손과 후학들에게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과 자긍이 걸린 문제였다.

이황이 누구인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성리학을 체계화해 오늘날 ‘동방의 주자’라고까지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수석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바로 퇴계를 주향으로 모신 여강서원(훗날 호계서원)의 좌배향에 위패를 안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서애 문중·후학들과 학봉 문중·후학들 사이에 벌어진 다툼이 ‘병호시비’라 불리는 영남 유림의 400년에 걸친 논란이었다. 이 병호시비의 현장인 호계서원의 복설 고유제와 추향제가 지난달 20일 안동에서 봉행 됐다. 이날 행사에는 두 문중 사람들뿐 아니라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영세 안동시장 등 영남지역 관계와 학계, 정계, 교육계 등을 망라해 각계 인사들도 참석했다.

호계서원의 복원은 그 자체로도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400년을 이어온 병호시비의 마침표라는 의미, 즉 영남 유림의 두 기둥이랄 수 있는 서애와 학봉 두 문중의 화합의 자리라는 의미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함께한 것이다.

병호시비는 과학·기술 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사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체면만 앞세운 고리타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집안 간 싸움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지도이념이자 사회개혁 및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발전 과정과 그 속에서 치열하게 학문했던 조상들의 정신이 들어 있다.

◆ 병호시비

퇴계 이황은 마흔여섯 되던 해인 1546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에 돌아와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그의 학문적 명성에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많은 제자 중에 우뚝 솟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퇴계는 학봉을 보고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고 서애를 보고는 ‘하늘이 내린 아이’라 했다고 한다. 그만큼 학문이나 인품 등 어느 면으로나 쉬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이 뛰어났음을 스승인 퇴계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들인지라 1620년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모신 여강서원에 학봉과 서애를 함께 배향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그 결정 자체에 이미 좌배향의 서열 다툼이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 두 가문의 후학들은 당시 나름의 이유를 들어 상대 문중에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서애 측은 관직의 서열을, 학봉 측은 나이를 기준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학봉은 나이로는 서애보다 네 살 위이고 퇴계 문하에도 먼저 들어간 입제자였다. 그러나 벼슬이 관찰사에 머물러 영의정을 지낸 서애보다 낮았다.

결국 논란은 있었지만 학봉을 좌배향, 서애를 우배향하는 것으로 시비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에 순순히 승복할 수 없었던 서애 문중에서는 그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상주에 내려와 있던 영남 유림의 거두 우복 정경세(1563~1633)를 중심으로 ‘서애가 좌배향돼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1805년에는 영남 유림이 서울 문묘에 김성일, 류성룡과 함께 한강 정구(1543~1620), 여헌 장현광(1554~1637) 네 분을 종사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리게 됐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누구를 앞에 적느냐를 두고 문제가 생겼다. 나이순으로 학봉이 앞에 적히자 이에 반발한 서애 쪽에서 따로 상소를 올렸고, 일이 시끄러워지자 조정에서는 아예 이 사안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이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따로 두 분을 대구 이강서원에 모시는 것으로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그런데 통문에서 학봉이 앞에 나오자 서애 쪽에서 이를 다시 문제 삼는다. 200여 년에 걸쳐 이렇게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가 되자 서애파는 호계서원과 결별하게 된다. 그 결과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따로 모셔진다.

이런 두 문중의 수백 년에 걸친 다툼을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 해서 ‘병호시비’라 불렀고, 또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의 앞 글자를 따 서애 후학들은 ‘병파’, 학봉 후학들은 ‘호파’라 했다.

후손과 후학들은 이렇게 대립했지만, 사실 서애와 학봉은 요즘 말로 하면 절친이었다.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했고 왜국에 통신사로도 함께 다녀온 사이였다.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방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1593년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안동 유림에서는 퇴계의 수제자이자 학맥을 이은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서애 류성룡은 25세에 벼슬길에 나가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임진왜란 중인 51세 때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무고로 관직에서 물러나 1599년 나이 58세에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다 1607년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 400년 병호시비의 끝(?)

서애 문중과 학봉 문중이 화해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2009년이었다. 당시 서애 종가의 종손과 학봉 종가의 종손이 만나 퇴계를 중심으로 서애는 좌배향, 학봉은 우배향하기로 하는데 합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안동시와 경북도에서도 호계서원의 복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다툼의 세월이 오래였던 만큼 두 문중 간 합의 소식에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가 나왔다. 퇴계 문중의 후손과 후학들은 ‘병호시비는 단순히 양 문중 간 서열을 따지기 위한 갈등이 아니다. 당대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안동지역 두 거목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이 함께 담겨 있는 문제로 긍정적 시비는 계속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몇몇 특정 가문이 나서 배향 문제를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양 문중의 배향 합의와 더불어 전국 유림의 뜻을 받들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 5월에는 ‘호계서원 복설 추진 확약식’이 경북도청에서 열렸다. 이날 확약식에서는 또 학봉 문중의 의견을 반영해 대산 이상정(1710~1781)을 추가로 호계서원에 우배향 추정하기로 결의했다.

대산 이상정은 1711년(숙종 37) 안동에서 태어나 퇴계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25세 때 벼슬길에 나가지만 당시 영남 남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젊어서부터 안동에 대산서당을 짓고 퇴계의 학통을 계승해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다. 31세 때 퇴계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아 저술한 ‘퇴계서절요’는 퇴계학의 핵심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에는 복원하는 호계서원의 위치가 문제가 됐다. 처음 정한 위치가 안동댐 인근 민속촌이었는데, 이 장소가 너무 좁다는 의견이 있어 나중에 한국국학진흥원 내 부지로 위치를 변경한 것을 두고 반대 의견이 나온 것이다. 일부 유림에서 ‘호계서원과 도산서원은 각각 안동과 예안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에 복설 장소는 당연히 당초 위치나 그 주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호계서원

호계서원은 1573년(선조 6) 퇴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영남 유림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처음에는 여강서원이란 이름으로 건립해,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학봉과 서애의 위패가 이곳에 배향되고, 1676년(숙종 2)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이때부터 사액서원이 됐다.

그러나 좌배향을 둘러싼 두 문중 간의 서열 다툼이 계속되자, 결국 1805년에는 퇴계와 학봉, 서애의 위패를 제자들이 각각 다른 서원으로 모셔가고, 모실 분이 없게 된 호계서원에는 강당만 남게 된다.

그 후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년)에 따라 전국의 서원이 훼철되는 가운데 호계서원도 그 불운을 피해 가지 못했지만 다행히 7년 뒤에 강당은 새로 지어진다. 명맥을 이어오던 호계서원은 그러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가 되면서 임하댐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박준우 논설위원 겸 특집부장

▲ 메인사진-안동 국학진흥원 인근에 이건, 복원된 호계서원에서 지난달 20일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 및 추향제’가 봉행 되고 있다. 1573년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호계서원(당시 여강서원)은 서원 그 자체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그 후 서애와 학봉을 배향하면서 벌어진 서열 다툼인 400년에 걸친 ‘병호시비’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안동시청 제공
▲ 메인사진-안동 국학진흥원 인근에 이건, 복원된 호계서원에서 지난달 20일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 및 추향제’가 봉행 되고 있다. 1573년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호계서원(당시 여강서원)은 서원 그 자체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그 후 서애와 학봉을 배향하면서 벌어진 서열 다툼인 400년에 걸친 ‘병호시비’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안동시청 제공
▲ 서브사진1-이건, 복원된 호계서원 전경.
▲ 서브사진1-이건, 복원된 호계서원 전경.
▲ 서브사진2-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
▲ 서브사진2-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
▲ 서브사진3-퇴계 이황의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
▲ 서브사진3-퇴계 이황의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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