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눈발이 날린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새벽, 길을 나섰다. 어둑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가파른 오르막길을 달려 팔공산으로 향했다. 산 중턱을 지나니 벌써 귓속이 먹먹해 온다. 졸음을 쫓느라 차창을 열어보니 귓가에 닿는 공기가 바늘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식구들이 다 모였다. 수험생을 둔 집이라면 종교에 상관없이 한 번쯤은 올랐을 법한 팔공산 갓바위, 그 부처님을 찾아 등산하기로 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시는 갓바위 약사여래불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정성 들여 기도를 올리다 보면 평생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질 것이리라.

코로나19 환자가 1천명을 넘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진다. 휴일이라 검사 건수가 적었을 터인데도 이런 수치라면 주중에는 더 치솟을 듯해 걱정이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숨은 벌써 가빠오는데 휴대폰에서는 쉴 새 없이 알림음이 울린다. 거리두기를 해달라는 안전문자들, 확진자 알림 문자, 확진 환자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는 감염관리실의 호출 카톡 창까지 여러 차례 진동이 울린다. 그때마다 확인하다 보니 걸음은 자꾸 늦어지고 숨은 더 답답해진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환자뿐 아니라 타지역의 환자들까지 먼 거리에서 병실을 찾아 구급차를 타고 이송돼 오게 된다니! 앞으로 이 일을 어쩌면 좋으랴 싶다.

돌 전 영아부터 구십을 바라보는 어르신까지 증상이 적혀있는 이송소견서를 보면서 숨이 가빠온다. 이른 시간이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적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앞으로 옮기며 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짜나간다. 얼른 이런 재난 사태가 끝나서 마음 편하게 사람들과 만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야지 않겠는가. 모두의 가슴속에 간절한 소망으로 간직돼 있을 공통의 소원을 수능일만 되면 조명되던 갓바위 약사여래불께 간절히 소망해야겠다.

선본사 쪽으로 오르면 쉬운 길이라고 해 그쪽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본다. 가끔 울타리에 기대어 올라온 산들을 뒤돌아보니 가슴이 좀 트인다. 흐릿하던 날씨도 기분에 따라 바뀌었던가. 어느 순간 공기엔 차가움 대신 따스함이 느껴지고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등산화를 신고 양손에 스틱을 집고 장비를 갖추고 오르면서도 숨이 헐떡이는데 저만치서 하얀 고무신을 신은 할머니 한 분이 발랑발랑 소리가 날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오신다. 입은 바지는 몸빼처럼 얇아 보이는 것이고 위에는 그냥 스웨터 차림이시다. 히말라야 정상이라도 오를 듯이 단단히 무장한 차림새로 나선 내 모습이 갑자기 내려다보이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가벼운 차림새의 연세 드신 할머님도 저렇게 가벼이 다녀오시는 길을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이가 이렇게도 헐떡대다니. 무안한 마음을 달래며 질문을 건냈다. “갓 바위까지 아직 멀었습니까?” 여쭈니 할머님은 뒤로 돌아서서 손으로 가리키시며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신다. “바로 저기야, 얼마 안 가면 바로 나와~!”라고.

다시 힘을 내 무릎을 짚어가며 오르기 시작한다. 끝없이 계단이 이어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두 방망이질하는 듯이 쿵쿵댄다. 그 소리가 귓전에까지 들려 올 것 같은 순간 염불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드디어 갓바위에 다가든 모양이다. 반야심경을 외고 있는 비구니 스님의 목청이 아침 공기를 가르며 가슴에 파고든다. 불교의 교리를 잘 알지 못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생하지 않으며 매사에 집착을 버리면 복을 지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믿는 신께 복을 기원하고 갈구하기보다는 복은 스스로 짓는 만큼 이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좋지 않은 행동은 삼가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스스로 복을 짓는 것이 아니랴 싶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소원을 되새긴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단단한 바위를 뚫듯이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을 빌어보자. 그러면 박사모처럼 갓을 머리에 쓰고 계신 인자하신 모습의 관봉약사여래불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랴. 저마다의 가슴속의 소원을 되새기면서 남은 한 해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그리해 더 나은 새해를 맞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약사여래불을 마음으로 불러대는 등산객들의 갈구가 갓바위 부처님께 닿아서 각자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온 나라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기를, 한 가지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