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

시인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가 보다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인간, 그것도 자유를 가진 인간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을까? 그것은 신으로부터의 자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 관습과 통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가치는 근대를 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성취했는가.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무엇보다도 종교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가 이토록이나 우리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범신론자인 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굳이 특정한 신을 특정한 장소에서 경배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모여서 예배하는 종교의 방식이 코로나를 유행시킨다면서 정부에서는 한사코 말리는데 일부 종교 단체에서는 한사코 사원 안에서의 예배를 고집한다. 중세를 넘어 근대를 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렇게 종교에 매여 있었던가. 그렇다면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던 근대인의 정신은 다시 중세로 회귀했단 말인가. 나는 특정 종교를 믿어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의 예배 방식이 과연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성취한 것인지, 아니면 신에게 인간이 종속된 것인지 묻고 싶다.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여러 가지 제도와 인식의 전환으로 수십 년 전 받았던 교육의 틀을 부정하면서 성취해 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완전한 자유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현대인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는 자유를 찾아가는 게 분명해 보인다. 국가와 개인은 분리 불가능한 관계라서 상호 이익을 위해 일부는 양보하고 일부는 권력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다는 심리적 해방감은 여러 가지 자유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얼마나 좋은가, 이런 자유로운 상상과 행동이.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스스로를 국가 권력에 종속시킨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가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 그것이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내가 있으니 국가가 있는 것인데 일부의 사람들은 국가가 있어 내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스스로 종속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인간 개인이 당연히 해야 할 태도라고 보고 타인의 자유마저 억압하려고 한다. 마치 특정 종교가 끊임없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그 종교 안으로 사람을 끌어 들이듯이 이들도 끊임없이 국가 권력 아래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종교로부터의 자유에 비해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는데 관습과 통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성취하기란 쉽지 않다. 관습이나 통념이란 것이 나도 모르게 내 생활 습관에 스며 드는 것이라서 우리가 그 관습과 통념에 얽매여 있는지조차도 모를 때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바로 이 관습과 통념을 비트는 유쾌한 유행어인데, ‘라떼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말들을 보면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이미 ‘나 때는 말이야’라고 하지 않고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것이 이런 관습과 통념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라떼’라는 커피가 등장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이 말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볼 때 지금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관습과 통념은 비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관습과 통념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느 정도 이루어가고 있지만 종교로부터의 자유는 중세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 기술을 부정하고 오직 신만을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그들은 지금도 16세기에 막을 내린 중세의 암흑기를 사는 중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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