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98>보양과 배나무

발행일 2021-01-25 09:52:5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보양화상이 이무기를 숨기고 배나무를 가리켜 사자가 배나무에 벼락을 쳤다

신라시대 대작갑사로 불리다 고려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편액을 내려주면서 절 이름이 운문사로 불리게 됐다. 대웅보전의 비로자나 삼신불회도의 모습. 보물 제161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이야기는 한자로 쓰여졌다.

당시 기록이 한자 이외의 방법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과는 다르게 음과 훈으로 구성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보양과 배나무편에서 말하는 배나무는 당시 한자로 표기하면 이목(李木)이 된다.

이목은 우리말로 읽어보면 이무기가 되기도 한다.

보양화상이 이무기를 찾는 천제의 사자에게 이목, 배나무를 가리킨 것은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돼 그의 친구 이무기를 살린 것이다.

이러한 표기법에 따라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진실들이 삼국유사 안에 얼마나 많이 들어있을지 고민해 볼 일이다.

이무기를 찾는 하늘의 사자에게 이목을 가리켜 난을 피해간 지혜를 배우고 싶은 장이다.

또 가진 재주를 무턱대고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엿듣게 하는 편이다.

신라시대 운문사에 있었던 배나무는 보이지 않고, 오래된 처진 소나무가 일주문 범종루를 들어서면 바로 마주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보양과 배나무

승려 보양의 전기에는 고향과 족보가 실리지 않았으나 청도군에 보관된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기재돼 있다.

운문산 선원의 장생 표시에 의하면 남쪽은 아니점이며 동쪽은 가서현이다.

절의 간부 승려 중 주된 사람은 보양화상이자, 선원의 주인은 현회장로이며, 선원의 일은 현량상좌가 담당하고 직세는 신원선사이다.

정릉 6년(1161) 신사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절로서 작갑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지만 후삼국이 싸우는 동안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다섯 갑의 절이 모두 무너져 없어지니, 다섯 갑의 절 기둥을 모두 모아서 대작갑사에 뒀다.

이 절의 시조 되는 스님인 지식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받아 돌아오는 길에 서해 바다 가운데에서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고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했다.

겸해 그의 아들 이목도 바치며 그를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지금 삼국이 어지럽고 난리가 일어나 아직은 불법에 귀의하는 임금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짓고 거기에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몇 해가 안 돼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현명한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법회를 진행했던 사방이 확 트인 강당 만세루. 경북도 유형문화재 424호이다.


용왕이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 이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그에게 주고는 사라졌다.

이에 보양법사가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어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흔적이 없었다.

다시 올라가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서해의 용왕이 작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나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자 과연 옛날의 벽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서 높이 쌓으니 탑이 완성됐는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이곳이 이전의 절터임을 깨닫고 절을 세우고는 거기에 머무르며 절의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보양법사가 여기 와서 절을 짓고 머무른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다섯 갑의 전체 전답 500결을 이 절에 바쳤다.

그리고 청태 4년 정유(937)에 운문선사라는 현판을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런 음덕을 받들게 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남몰래 도왔다.

갑자기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말라서 타 죽으므로 보양법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한 고을이 흡족해졌다.

운문사 대웅보전 앞의 삼층석탑. 보물 678호로 지정됐다. 1층 기단석에는 팔부신중상이 돌아가면서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천제가 그의 소임이 아닌 일을 했다 해 이목을 죽이려하자 이목이 황급히 법사에게 알렸다.

법사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자 조금 뒤에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니 사자는 그곳에 벼락을 친 후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배나무가 시들고 부러졌으나 용이 어루만지자 곧 살아났다.

그 나무가 근년에 땅에 쓰러지니 어떤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는 방망이를 만들어 법당과 식당에 뒀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군에 있는 봉성사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지방을 정벌해 청도까지 진출했으나 산적들이 견성에 모여 교만을 부리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도착하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었다.

법사가 “대개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은 지키고 뒤는 잊어버리니 마땅히 낮에 그 뒤를 쳐야 할 것입니다”라 대답했다.

사방이 트인 만세루에 걸린 북.


태조가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적이 패하고 항복했다.

태조가 법사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주변 고을에서 세금으로 받는 벼 50석을 줘 예불하는데 쓰게 했다.

이로써 절에 두 분 성인의 초상을 모셨다. 이런 연유로 절 이름을 봉성사라 했다. 그 뒤에 법사는 작갑사로 옮겨서 절을 크게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리지 않았으나 세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석굴사의 비허사와 형제가 됐다.

봉성사, 석굴사, 운문사의 세 절이 연접된 봉우리에 늘어서 있으므로 서로 왕래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지않고 남은 석가모니 500명의 제자를 모신 나한전. 운문사는 오백나한 모두 별도로 공양을 올리는 전통이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보양화상과 이목이 막은 몽고난

몽고군은 신라말부터 고려시대까지 수시로 넘나들며 약탈해갔다.

몽고군은 이미 고려의 방방곡곡 풍수지리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속도전으로 밀고 들어와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몽고군의 본격적인 침략전쟁은 1231년부터 1270년까지 40여 년간 줄기차게 이어졌다.

몽고군은 잔인해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성하게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초가에 불을 놓아 모두 태워 생활의 근거지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고 뿌리를 뽑았다.

몽고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라도 돌라치면 백성들은 일찌감치 괴나리봇짐을 싸서 집을 버리고 산골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정도였다.

운문사 대웅보전과 만세전 사이에 감로천이라 새긴 물을 담은 석조. 몸과 마음을 먼저 씻는다는 의미다.


몽고의 실세 오고타이칸은 장수 살리타에게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살리타는 활의 명수였다. 말을 달리면서 마상에서 쏘는 화살이 뛰어가는 고려군사의 다리와 등에 정확하게 날아와 박혔다.

살리타는 순식간에 귀주성을 함락하고, 남쪽으로 말을 달려 한양을 공격했다. 잇따라 한강을 넘어 용인, 안동, 달구벌 대구, 서라벌 경주까지 휩쓸었다.

살리타가 달구벌에서 재를 넘어 청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불도가 높은 대작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살리타는 직접 선두에 서서 대작갑사로 말을 달렸다. 대작갑사 앞에서 화살촉에 불을 붙여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살리타의 화살은 대작갑사 담을 넘지 못하고 공중에서 불이 꺼진 채로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운문사는 신라시대 처음 세워졌지만 전쟁 등으로 여러 번 중창되었다. 원응국사가 1076년에 중창했다. 원응국사 학일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탑비로 국보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몽고병사들이 소나기처럼 쏜 화살은 모두 낙엽비가 되어 대작갑사 일주문 앞에 장작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살리타가 놀란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창을 들어 군사들과 절 안으로 말을 달리려 할 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면서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리고 일주문 위로 거대한 이무기가 용의 모습으로 꼬리춤을 추면서 입으로 불을 뿜어댔다.

이를 본 몽고병사들은 아연실색해 말을 돌렸다.

살리타 장수의 말도 앞발을 들었다가 뒷걸음치다 고꾸라졌다.

몽고군은 그대로 후퇴해 달구벌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청도 쪽으로는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영천 방향으로 진격해 경주로 이름이 바뀐 서라벌을 공격했다.

몽고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보양화상의 주문과 이무기의 협치다.

몽고군을 물리친 대작갑사의 소식을 들은 고려왕실에서는 왕이 직접 ‘운문선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선사로 불린다.

청도에서 놀라고, 화가 치민 살리타는 경주에서 화풀이를 했다.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였다.

신라 삼국통일의 근원이자 고려의 상징으로 우뚝 솟은 황룡사구층목탑도 이때 화마에 휩싸여 잿더미가 됐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해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의 역사로 이뤄진 황룡사는 주춧돌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몽고전쟁의 가장 큰 손실이라면 황룡사 소실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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