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겸손한가

발행일 2021-03-02 09:29:0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박운석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맹사성(孟思誠·1360~1438)은 조선 세종 때 명재상으로 조선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좌의정을 지냈다.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많아 조선 초기 음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뛰어난 능력과 인품 외에도 청렴한 생활로 역대 최고의 청백리로 평가받고 있다. 겸손이 몸에 배어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을 갖추고 대문 앞에서 맞았고 손님이 말을 타고 돌아간 후에야 집으로 들어올 정도였다.

맹사성이 겸손의 대명사가 된 건 젊었을 때의 교훈이 한 몫 했다. 그는 어느 날 유명한 고승을 찾아가 목민관의 도리를 물었다.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풀라”는 고승의 말에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고승은 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를 뿐이었다. 찻물이 넘쳐흘러 방바닥을 적신다는 맹사성의 외침에 고승은 태연하게 말했다. “찻잔이 넘쳐흘러 바닥을 망치는 것은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에 황망히 일어나 나가려다 문틀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러자 고승은 다시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지도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라는 겸손의 가르침은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에도 있다. 이 서원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이 서원의 중심건물인 중정당(中正堂)으로 가려면 환주문(喚主門)을 지나야 한다. 이 문은 갓을 쓴 유생들의 경우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은 것이 특징이다. 예를 갖춰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이 문을 지나지 못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앞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 뒷짐을 진 채로는 배움의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음을 은연중에 가르쳐준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정해졌고, 무소속 금태섭 예비후보와의 경선에서 이긴 국민의당 안철수 예비후보는 4일 국민의힘 최종 후보와 야권 단일후보를 놓고 승부를 펼치게 된다.

이때쯤이면 후보자들 뿐 아니라 여야 정치인 모두 겸손해진다. 가보지 않은 환주문 앞에 서있는 양 고개를 숙인다. 평소에 잘 찾지 않던 시장으로 몰려가 어묵을 한입씩 베어 물고는 사진을 찍는다. 겸손함을 넘어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연신 90도 절을 하기도 한다.

국민들 앞에서 선거철 한 때나마 겸손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약점을 꼬투리삼아 비방하는 것도 선거 때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그들에게 사찰의 법당이나 처소 앞 디딤돌 위에 붙은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를 보여주고 싶다. ‘다리 아래를 잘 살피고 돌아보라’는 뜻으로 디딤돌 위의 조고각하는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두라는 말이다. 하지만 ‘조고각하’가 신발 정돈만 잘하라는 말은 아닐 터. 넓게는 다른 사람의 흠을 찾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흠은 없는지 먼저 돌아보라는 의미다. 눈은 속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목불견첩(目不見睫)’도 같은 말이다. 자신의 잘못은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을 보고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걸 빗댄 경우다. 이 역시 겸손하라는 가르침이다.

선거를 앞두고 겸손 코스프레를 할 게 뻔한 그들에게 묻고 싶다.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 적 있는가. 평소에 환주문 앞에 선 듯 국민들 앞에서 겸손했는가. 자신의 허물을 찾아보고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더럽히는 것만 보이고 나의 알량한 지식을 과도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는가. 내 발밑을 잘 살피고 있는가.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머리를 너무 높이 들지 말라. 모든 입구는 낮은 법이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고 한다. 서울시장이든, 부산시장이든 입구는 낮은 법이다. 누구든 시장이 된 후에도 머리를 너무 높이 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이념이나 자신의 지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결국 겸손하지 못한 것이고 ‘조고각하’를 하지 않아서일 수 있다. 이마저도 어렵게 생각된다면 도동서원을 찾아가면 된다. 겸손한 유생들만 드나들 수 있는 환주문 앞에 서서 ‘나는 자격이 있는가’를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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