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우거진/ 뒤꼍을 돌아가다가/ 녹슨 양철동이 속의/ 숯검정 하나를 만난다/ 숯검정에 불을 붙여/ 다림질하던 추석 전날 아침/ 그날 아침은 재재거리던 제비들을/ 지붕 위로 쫓고/ 어머니는 밤새 지은 옷들을/ 빨랫줄에 내다 널었다/ 이슬에 촉촉이 젖은 고운 옷들을/ 어머니께서는 다리시고/ 나는 호박단, 뉴똥, 항라의 결 고운 옷들/ 가장자리를 잡아주며/ 속이 발갛게 달아오른 숯덩이, 여신 펼쳐진/ 옷감 위를 오르내리는, 얼굴 환하게/ 바라보았었다// 검정치마를 입고/ 메주콩을 꼬시게 따먹으며/ 문고리에 검정 고무줄을 걸어놓고/ 고무줄을 넘으며 뜀박질을 하던/ 가시내는,/ 낮은 시렁에 매달아놓은/ 메주에 곧잘 박아 혹이 동그랗게 나고/ 유독 살아 검은, 그 골방에서/ 겨울을 나던 가시내는/ 각시풀을 찾아 길게 땋아/ 각시 인형을 만들고/ 바람 찬 논두렁의/ 냉이와 씀바귀를 찾아/ 때 낀 손들도 갈라져서/ 얼얼이 핏빛도 비쳐드는/ 곧 강물은 풀려/ 봄은 오고 있겠지// 아직은 쌀쌀한 2월/ 쪽진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맨/ 시골아줌마들이 역전이나 버스주차장에 나와/ 메주를 앞에 놓고 앉아있다/ 이른 봄의 냉이와 부추, 참쑥, 쏙음 배추의/ 흙 묻은 손도 함께 시장어귀까지 나와/ 몸빼 차림으로 퍼대고 앉아있다/ 검은 치마의 그 가시내도 입 다물고/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어머니는 곰팡이를 대강 씻어내고/ 손 없는 날을 골라/ 햇볕에 장을 담갔다/ 우리 집 가장 배가 부른 장독은/ 동동 붉은 고추도 띄우고/ 숯검정도 띄우고/ 살이 노란 마른 명태도 띄우고/ 햇볕 속에 만삭을 기다렸다/ 기인 봄날의 햇덩이는 온통 이곳에서 이글거렸다/ 노오란 명태 살이 삭아가며/ 까아만 장물이 우러나며/ ‘찬바람이 일 때쯤 무를 썰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봐’/ 장을 뜨시던 날 어머니는 된장을 이기시며 말씀하셨다// 그해 가실 겨울은 온통 시원한 된장국으로 났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된장국을 맛있게 먹고 낳은 딸은/ 살이 검었다/ ‘속살이 검으면 남편복이 있대’/ 칠에 동서들은 갓난애/ 목욕을 시키시며/ 새로 사온 한 벌의 옷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다// 검은 살밑의 반짝반짝/ 숯검정이 우리 아가는/ 제비처럼 날아다니며/ 엄마의 뽀뽀를 받고/ 그러허다. 세상 여자는 숯검정이 될 일이다/ 마음에 확 불이 불던/ 그 산속 가마의 불을 잊지 못하며/ 늘 뜨거운 불속을 그리워한다/ 검둥이든 흰둥이든 여자의 영혼은/ 까아만 숯검정일 뿐이다/ 까맣게 뒷 모퉁이에 검은 눈 반짝이며/ 앉아있거나/ 딸 난 집 금기 줄에 꽂혀있거나/ 서낭당 굵은 나무 허리 새끼줄에 꽂혀있다가도/ 사랑을 받으면 은은한 윤기 흐르는 몸의/ 여자는 두 눈 반짝이는 숯검정이 된다/ 바람 부는 날의 가을, 으스러지게 껴안겨/ 따뜻한 불 피우는/ 이글이글 천의 바다를 넘나들고/ 이 땅의 허무의 색깔인 모든/ 낙엽들을 태우고도 찬연한/ 여자는 유독 속에서부터 빨갛게 달아오르는/ 숯검정이 된다// 보게나, 여자들의 서글한 검은 눈이/숯검정이로 애타게 부르고 있네/ 숯검정이로 빛나면서 떨어지고 있네

「숯검정이 여자」 (청하, 1985)

숯을 보면 된장 담그던 어머니와 그 위에 띄워두었던 숯검정이가 떠오른다. 숯검정이 정기가 된장으로 배여 들었고 그 시원한 된장국을 먹고 딸을 낳았다. 된장의 기운이 딸에게 전해졌다. 딸은 여인으로 성숙하고 속살 검은 여인은 불타오르고픈 숯검정이 화신이다. 모성의 뭉근함과 성숙한 여인의 터질 듯 부푼 에로티즘의 화음이 절묘하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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