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느린 변화가 아름답다

김시욱
김시욱

에녹원장

‘빨리 빨리’가 우리를 대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빠른 결과를 원했던 시대적 아픔이었는지도 모른다.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간절한 바램이었다. 해방이후, 그 간절함 속에서 시작된 정부 수립과정은 좌우로 분열되고 찬탁과 반탁으로 이뤄지는 조급함이 앞서게 된다. 독립의 주도자적 역할을 하지 못한 자조적 반성이 이뤄 낸 성급한 진영논리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가 결핍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검증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답습한 또 하나의 오류였다. 결국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과 미국이 점령한 남쪽은 신탁통치의 길로 들어서고 좌우의 진영논리는 고착화됐다. 친일세력이 좌우 양진영에서 오늘날까지 잔존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곧이어 터진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아픔과 한반도를 폐허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흔히 스페인 내전과 비교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정부의 승리와는 달리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미국과 소련 주도의 휴전은 해방의 과정과 다름없는 주체적 역할의 상실이었다. 국가 외교력의 한계와 맞물리는 북한을 염두에 둔 정부 정책은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폐허 속에서 만들어진 ‘한강의 기적’은 경제성장과 인권유린, 산업화와 환경파괴라는 ‘비대칭적 안정’으로 유지돼 왔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만성적 파업으로 이어져왔으며 ‘빨리 빨리’로 표현되는 우리 문화의 저변으로 자리 잡아왔다.

다행히 ‘느림의 미학’이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세대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한걸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산책과 올레길은 자신의 삶과 세상과의 연결을 바라보게 한다. 느림의 전문가 ‘칼 오너리’는 그의 저서 느린 것이 아름답다(In Praise of Slow)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느리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디어가 ‘뒤에서 서서히 끓게’ 할 시간이 있을 때 우리가 하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직관력 있고, 창조적이며, 양질의 것이다. 느림은 풍부하고 미묘한 통찰력을 생산해준다.

이는 곧 느림의 미학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결과에 집착한 성급함만이 능사가 아님을, 그것으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통한의 후회가 없어야 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빠름과 늦음으로 표현되는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으로 표현되는 그 시간의 잣대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 주기로 계산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은 ‘시간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하물며 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시간의 절대성이 아니라 ‘시간의 영속성’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온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해방과 독립, 정부 수립과 경제성장을 위한 시간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시간의 절대성’에 사로잡혀 빠름을 통한 결과에 대한 집착은 아니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코로나19로 인한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이 끊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역설적이지만 안방에서의 자유로운 세계여행이라는 여유를 선사한다. 넷플릭스와 교육방송을 통한 다큐멘타리 여행은 시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시간의 영속성과 그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동부에 위치한 데스벨리(death valley)의 움직이는 돌(sailing stones)이 그것이다. 인적이 드문 죽음의 계곡이기에 바위가 흔적을 남기며 움직인다는 사실은 수많은 주장과 이론들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2006년 NASA에 의한 연구가 시작되고 얼음판과 바람에 의한 돌의 움직임이라고 발표한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통한 초단위 촬영을 시도했지만 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실패해 이론만 있을 뿐 실체는 없는 셈이다. 시간의 영속성을 통한 자연의 경이로움일 뿐 인간의 평가적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모습을 꿈꿔본다. 세계의 재편과 그로인한 한국의 위치와 위상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다. 눈앞에 다가온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나라 전체가 매몰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선거에서 이기고자 국민을 현혹시키는 정책과 공약들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고민해야 한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 성급함의 폐해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고 반복될 수 있음을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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