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섰던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에 탄압을 받자 위기에 처한 총무 양기탁과 사장 어니스트 베델이 논의하는 모습이 모형화돼 전시 중이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섰던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에 탄압을 받자 위기에 처한 총무 양기탁과 사장 어니스트 베델이 논의하는 모습이 모형화돼 전시 중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쓴 지 1년이 지났다.

해가 바뀌고 곳곳에 봄기운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대구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자발적 참여 등으로 힘든 시기를 잘 헤쳐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00년대 초에도 대구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나랏빚을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마음들이 모여 전개한 시민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2월21일을 새로운 ‘대구시민의 날’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해 찾아가기도 쉽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지난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국가의 위기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응해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이 담긴 기록물로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소중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국채보상운동 찬조 영수증과 국채담보금영수증, 취지서, 통문, 광고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당시 상황을 모형으로 꾸며 놓았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확산으로 일제가 운동의 선두에 선 대한매일신보에 탄압을 가했고 이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과 총무 양기탁이 의논하고 있는 모습의 모형을 볼 수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여러 의미와 가치가 있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주도한 한국 최초의 시민운동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운동으로도 평가받는다는 점이다.

1천300만 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300억 원이 넘는 큰 돈을 갚기 위해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성들은 비녀와 금반지를 모았으며 걸인들도 구걸한 돈을 내놓을 만큼 참여 열기는 뜨거웠다.

비록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속에 담긴 시민들의 열망과 정신은 결코 실패라고 할 수 없다.

모금 운동이 1910년까지 전국으로 확산된 배경에는 대구시민들의 저력이 있었으며 이 결집된 힘은 1919년 3·1운동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지난 2월15일 수리를 마치고 재개관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찾았을 때가 점심시간 무렵이라 많은 직장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 나온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한가운데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지사 김광제, 서상돈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은 반월당 이상화 고택 옆에 보존돼 있고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함께 둘러봐도 좋겠다.



이주영

대구시교육청 교육사랑기자단



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