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에 동화사를 창건



▲ 동화사 동편 계곡을 건너 별채로 조성된 금당선원. 심지스님이 부처님의 간자를 이어받아 팔공산 정상에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당초 심지스님이 절을 지었다는 곳으로 전한다.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 동화사 동편 계곡을 건너 별채로 조성된 금당선원. 심지스님이 부처님의 간자를 이어받아 팔공산 정상에서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당초 심지스님이 절을 지었다는 곳으로 전한다.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심지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에서 동화사를 창건했다.

동화사에는 창건 후 1천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심지가 세운 삼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의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비로암의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형식으로 건축돼 대부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고,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큰 훼손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보물 제247호와 24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심지스님은 삼국유사에서는 헌덕대왕의 아들이라며 우애가 있었다고 표현해 형제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대부분의 사서는 헌덕왕은 아들이 없어 동생 흥덕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엇갈리는 부분이다.



왕자가 궁궐을 벗어나 천년이 지나도록 만인이 우러러보는 고승이 됐던 심지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삶의 기술을 배우는 길이 될 듯하다.





▲ 신라시대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다는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244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비로암.
▲ 신라시대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다는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244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비로암.


◆삼국유사: 심지가 진표조사를 계승하다

승려 심지는 진한 제41대 임금인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온화하고 슬기로웠다. 나이 15세에 세속의 옷을 벗고 스승을 따라 부지런히 불도를 닦으며 중악에 머물렀다.



마침 속리산에 있던 영심공이 진표율사의 부처님 뼈로 된 간자를 전해 받아 과증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는 뜻을 결정해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례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땅에 자리를 펴고 마당을 치면서 여러 무리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이레가 지나자 하늘에서 비와 눈이 몹시 내렸으나 심지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방 열자 가량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함과 기이함을 보고 불당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심지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방 안으로 물러가 당을 향해 예배하는데 팔꿈치와 이마 모두에서 피가 흘러 진표율사가 선계산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다.





▲ 동화사 대웅전에 오르기 위해 먼저 거쳐야 하는 건물로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 봉서루의 모습.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 양식이다. 누각을 오르는 계단 입구에 봉황의 꼬리,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돌이 눈길을 끈다.
▲ 동화사 대웅전에 오르기 위해 먼저 거쳐야 하는 건물로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 봉서루의 모습.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 양식이다. 누각을 오르는 계단 입구에 봉황의 꼬리,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돌이 눈길을 끈다.


지장보살이 날마다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두 개의 간자가 옷깃 사이에 붙어있는 것을 봤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영심에게 고하니 영심이 말하기를 “간자가 함 속에 있는데 어찌 여기에 있겠소?” 하면서 검사했다.

함을 봉한 표시는 예전과 다름없는데 열어보니 간자가 없었다. 영심이 매우 이상히 여겨 간자를 겹겹이 싸서 보관했다.



심지가 다시 가는데 먼저와 같았다.

또다시 돌아가 고하자 영심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봉행할지어다”라고 하면서 곧바로 간자를 줬다.



심지가 간자를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자 산신이 두 선자를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맞아 심지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 그들은 바위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공손히 정계를 받았다.



심지가 말하기를 “이제 터를 골라 불타의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우리들은 터를 정할 수가 없소이다. 청컨대 세 분과 함께 높은 곳에서 간자를 던져 점을 칩시다”고 말하고 즉시 산신들과 함께 봉우리 꼭대기로 올라가 서쪽으로 간자를 던졌다. 간자는 곧 바람에 날려갔다. 이때 신선이 노래를 이렇게 지어 불렀다.





▲ 동화사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건축물 대웅전.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자연미가 살아나는 전통 건축물로 보물 제156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내부의 삼존불, 진경산수화풍의 탱화, 천장을 장식하는 봉황 등이 건축물을 돋보이게 한다.
▲ 동화사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건축물 대웅전.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자연미가 살아나는 전통 건축물로 보물 제156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내부의 삼존불, 진경산수화풍의 탱화, 천장을 장식하는 봉황 등이 건축물을 돋보이게 한다.


‘막힌 바위 저멀리 물러가니 편편해지고, 낙엽 날아 흩어지니 나타나는 선명함이여, 부처님 뼈로 된 간자 찾아 얻어서, 정결한 곳 맞이하여 정성을 바치리라.’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숲 속에 있는 우물 안에서 간자를 찾아 즉시 그 자리에 불당을 지어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의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곳이다.



고려조의 예종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대궐로 맞아들여 우러러보며 경배했으나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한 개를 잃어버리고 상아로 대신 만들어 본래 뒀던 절로 보냈다. 지금은 점점 변해 같은 빛깔이 돼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그 바탕은 상아도 아니고 옥도 아니다.







▲ 통일신라 말기에 만든 높이 3.1m의 당간지주의 모습. 보물 제254호이며 동화사 입구에 서있다.
▲ 통일신라 말기에 만든 높이 3.1m의 당간지주의 모습. 보물 제254호이며 동화사 입구에 서있다.


점찰경 상권을 살펴보면 189개의 간자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1은 상승을 구해서 불퇴위를 얻음이며, 2는 구하는 과가 마땅한 증을 보이는 것이다.

제3과 제4는 중승과 하승을 구해 불퇴위를 얻는 것이다. 5는 신통을 구해서 성취하는 것이다.

6은 사범을 닦아서 성취하는 것이고, 7은 세간의 선을 닦아 성취하는 것이다.

8은 받고 싶던 묘계를 얻음이고, 9는 일찍이 받은 계를 다시 얻음이며, 10은 하승을 구해 신앙을 확보하지 못 함이다.

그 다음은 중승을 구해 신앙을 얻지 못 함이다. 이렇게 해 172까지는 모두 전생과 이생 사이에 더러는 착하기도 하고 더러는 악하기도 하며 얻기도 하며 잃기도 하는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간 것이다.

174는 죽어서 이미 축생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 아귀, 아수라, 인, 인왕, 천, 천왕, 문법, 출가, 성승을 만나보는 것,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 정토에 태어나는 것, 부처를 찾고, 하승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을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3세의 선악 과보를 차별하는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보아서 마음이 행하려고 하는 것과 간자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얻게 되면 감응이 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지극하지 못한 마음이니 이름하여 허류라고 한다.

그렇다면 8과 9의 두 개의 간자는 단지 189개의 간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문사 김관의가 편찬한 왕대종록 2권에서 말하기를 신라 말기에 신라의 큰스님 석충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 189개를 바쳤다고 했다. 지금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 동화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눠져 있다. 동쪽에서 계곡을 따라 급경사길을 오르며 진입하게 되는 봉황문. 바로 옆에 마애불좌상이 있다.
▲ 동화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눠져 있다. 동쪽에서 계곡을 따라 급경사길을 오르며 진입하게 되는 봉황문. 바로 옆에 마애불좌상이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자의 출가

심지는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헌덕왕은 이름이 언승으로 원성왕 큰 아들의 둘째 아들이다. 언승은 형과 두 동생, 4형제로 일찍부터 할아버지 원성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서 나라일을 배웠다.



원성왕이 죽은 다음 언승의 형이 신라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소성왕의 동생이었던 언승과 수종, 충공 3형제도 맏형의 일을 도와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맡아하는 대신이 됐다.



소성왕이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죽자, 동생이었던 언승은 조카 청명을 신라 제40대 애장왕으로 즉위하게 하고 실질적인 군주가 돼 섭정에 나섰다.



심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언승이 숙부들과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일에 대해 의논하는 모습들을 눈여겨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4촌 형제였던 애장왕과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같이 친하게 살갑게 지냈다. 특히 애장왕 청명의 누이 장미와는 소꿉장난을 하면서 부부 흉내를 내어가며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 동화사를 처음 창건한 심지 스님이 손수 정을 들고 새겼다고 전해지는 동화사 봉황문 앞의 절벽에 섬세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는 보물 제243호 동화사 마애불좌상.
▲ 동화사를 처음 창건한 심지 스님이 손수 정을 들고 새겼다고 전해지는 동화사 봉황문 앞의 절벽에 섬세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는 보물 제243호 동화사 마애불좌상.


그러던 어느날 심지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밀담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의 처소 앞을 지나는데 아버지와 삼촌들이 조카인 애장왕을 없애고 왕위를 빼앗자고 모의하는 이야기를 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심지의 아버지 언승은 상대등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정과 병력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조카 애장왕의 왕권도 마음대로 휘둘렀다.

언승의 동생들인 수종과 충공도 형의 말에는 아무런 저항없이 잘 따르는 편이었다.



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제거하고, 먼저 언승이 왕위에 오른 다음 아들이 아닌 동생들에게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심지는 친구처럼 지냈던 애장왕의 불행을 차마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 불문에 귀의하기로 마음먹고 아버님에게 나라를 돌아보며 백성들의 삶과 지역의 실정을 살펴보고 싶다고 아뢰어 허락을 얻었다. 그길로 심지는 거추장스런 일행들을 따돌리고 팔공산 깊숙이 들어가 계곡에서 수행에 매진했다.





▲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동화사 입구 별당 금당선원 입구 고목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부도탑. 부도탑은 바닥돌만 사각형이고 위의 부재들은 모두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다. 몸체를 덮고 있는 지붕돌도 팔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보물 제60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동화사 입구 별당 금당선원 입구 고목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부도탑. 부도탑은 바닥돌만 사각형이고 위의 부재들은 모두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다. 몸체를 덮고 있는 지붕돌도 팔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보물 제60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그러던 중 속리산 법주사에서 진표율사가 계승한 부처님의 뼈로 된 간자를 두고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을 재촉해 그 법회에 참석했다. 심지는 진표율사가 수행했던 점찰법을 따라 수행하며 법회에 참가했다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으로 돌아와 동화사를 창건했다.



심지는 마음속의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꿈에서 보았던 부처님의 모습을 손수 정을 들고 바위에 그대로 조각했다. 동화사 일주문 앞의 암벽에 새겨진 유희좌상의 마애불좌상이다. 심지스님의 작품 마애불은 천년 세월을 지나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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