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내 안에 있다

발행일 2021-03-14 15:34:3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홍석봉
홍석봉 논설위원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폭력과 광기의 결정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20만 명이 희생되는 등 유대인 600만 명이 인종 청소의 명목으로 학살됐다. 훗날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일을 저지른 나치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한 결과 이들이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명령에 복종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마가 됐다는 것이다.

1971년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짐바르도 교수는 ‘스탠퍼드 교도소’라는 모의 교도소를 만들어 실험했다. 짐바르도 교수는 평범한 학생들을 교도관과 죄수로 나눠 2주 동안 생활하도록 하면서 그들의 심리 변화를 관찰했다. 이 실험에서 교도관 역할의 참가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죄수 역할의 참가자들에게 체벌,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결국 상황이 급격히 악화돼 2주 예정의 실험이 6일 만에 종결됐다.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에 생포된 많은 이라크군 포로들이 바그다드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 갇혔다. 미군은 이들에게 고문과 가혹 행위를 했다.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가혹 행위를 한 미군 병사들은 고향에서는 매우 평범하고 순박한 인물들이었다.

-학교 폭력·자녀 학대, 인간의 잠재적 본능

인간에 잠재된 ‘악마적 본능’을 밝혀낸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상황에 장악당하면 누구든, 언제든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짐바르도 교수는 2007년 이 실험의 내용과 이라크 포로 고문 사건을 담은 ‘루시퍼 효과: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루시퍼는 천계에서 신들로부터 사랑받았으나 신의 분노를 사 하늘에서 추방당해 ‘악마(사탄)’가 됐다.

학교 폭력(학폭) 미투가 자고 나면 또 새로운 것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자배구 국가대표 자매의 학교폭력 고발이 신호탄이 됐다. 이후 스포츠계와 대중문화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들이 줄줄이 가해자로 지목돼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마침내 우리 주변까지 번졌다.

도 넘은 아동 학대도 쏟아졌다. 얼마 전 구미의 한 원룸에서 3세 아이가 반미라 상태로 발견됐다. 6개월이나 아이를 버린 뒤 방치해 숨졌다. 인천에서는 부모 학대로 8세 여아가 숨졌다. 경기도 용인에서는 무속인 이모가 10세짜리 조카를 폭행하고 물고문해 숨지게 했다.

학교 폭력은 자녀 체벌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육’이라는 이름의 자녀 학대가 뿌리인 셈이다. 학폭과 자녀 학대는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또 망가뜨린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간다. 학폭과 자녀 학대가 천사를 악마로 만든다. 일상 회복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학폭을 폭로하는 이들은 대개 MZ(밀레니엄+Z)세대다. 이들은 치열한 입시와 취업 경쟁 속에 정의와 공정성에 대해 눈떴다. SNS 등을 통해 학폭을 공론화했다.

학교 폭력 대부분은 중고교생 시절 일이다. 판단력이 미숙한 청소년기의 잘못 때문에 현재 처벌을 받는다. 논란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냥 넘겨버리기엔 피해가 너무 크다. 반성과 사과, 치유가 필요하다. 이것이 빌미가 돼 가해자의 앞길을 망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입법 능사일까…루시퍼 환경 경계해야

체육계 병폐를 죽음으로 고발한 선수의 이름을 딴 ‘최숙현 법’이 지난달 19일부터 시행됐다. 인권침해 행위 조사, 가해자 복귀 제한 등의 내용이 담겼다. 과연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학(大學)에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말이 나온다. ‘곱자(ㄱ자형 자)를 가지고 재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목수들이 곱자를 갖고 정확하게 치수를 재듯 내 마음을 살펴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혈구지도’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학교 폭력과 자녀 학대는 발생할 수 없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상황에 휘둘리게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내 안의 ‘루시퍼’를 경계해야 한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Tags 악마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