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경전」 (그루, 2005)
바다는 아득한 원시의 근원이다. 세속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면 바다로 달려가고픈 충동이 이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터운 가면과 거추장스런 치장이 바다바람과 파도소리에 실려 가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바다를 맞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를 씻어가 버린다. 바다는 세파에 찌든 심신을 다독여주고 지난 삶을 성찰하게 한다. 난마처럼 꼬이고 뒤틀린 번뇌도 바다 앞에선 초기상태로 포맷돼버린다. 시원하게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면 고갈된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걸 느낀다.
바다는 아득한 태초에 생명을 싹틔운 모태이다. 살다가 어려우면 어머니를 찾듯이 세상살이에 기진맥진해 희망을 잃고 정신 줄마저 놓게 될 한계상황에 처하면 모태를 찾아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바다를 경전으로 여기고 진리를 찾고자 애쓰는 모습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적 시도에 다름 아니다. 경전은 다양한 지혜를 준다. 때로는 용기를 북돋아주고 때로는 인내를 가르친다. 무릇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바다를 찾는 법이다.
시인은 바다경전을 읽고 시심을 얻었다. 젊을 땐 만용과 교만에 찌든 허상을 보고 시를 썼다. 바다의 겉모습에 취해 모두 다 통달한 양 건방을 떨고 우쭐거리며 허세를 부린 것이다. 파랑은 언제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고 있었지만 시인은 표면에 일렁이는 파도만 봤을 뿐이다. 경전의 자구에 사로잡혀 그 행간의 깊은 속뜻을 알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바다의 심연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파랑을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겸손을 배웠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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