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소복단장하고/ 어머님 젖가슴 같은/ 몽실몽실/ 하얀 목련 꽃봉오리/ 코로나19로/ 봄을 잊은 그대에게/ 봄노래 부른다// 긴 목에 매달린/ 고귀한 얼굴/ 옹그리고 있다가/ 봄 햇살 간질이매/ 방긋방긋 웃으며/ 임 오실 날만 기다린다// 한 번 떠난 그 임은/ 되돌아 올 줄도 모르는데/ 임 그리던 하얀 목련은/ 지난밤 봄비에 젖다// 바람 잡고 낙화되어 맨땅에 나뒹굴다가/ 임 소식 물어보며/ 흐드러진 꽃핀 시절/ 못 잊어 그리워한다// 하얀 목련화야!/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할쏘냐?/ 서러워 마라// 계절의 섭리 따라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무성한 녹음이 우거져/ 새가 울 것이며/ 또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열매 맺는 날도 예비되어 있도다

「이후문학」 (이후문학회, 2020)

목련은 이른 봄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피는 굳센 생명력이 기특하기도 하려니와 화려한 하얀 꽃잎은 눈부시다 못해 숨이 막힌다. 그렇다고 방자하거나 교만하지 않다. 자줏빛 자목련도 화사하긴 하지만 하얀 백목련에 비할 바 아니다. 순결하고 고고한 기품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도 울고 갈 정도다. 잎이 나기 전에 화려하게 꽃이 만개하는 까닭에 그 시각적인 대비효과로 인해 새하얀 꽃잎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맑고 향긋한 향기가 은은히 번지면 봄의 천사로서 더할 나위 없다.

호사다마라고 목련에게도 마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목련의 천적은 봄바람과 봄비다. 봄비에 봄바람이 곁들이는 날엔 목련은 초상을 치른다. 꽃잎이 크고 날렵한 만큼 비바람에 견딜 재간이 없다. 찬란한 꽃은 혹독한 시련에 대한 보상이고 결실이건만 그저 장난삼아 슬렁슬렁 일렁이는 꽃샘바람에 나가떨어지고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스멀스멀 스러진다. 떨어진 목련 꽃잎을 지켜보노라면 새삼 아름다움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바닥에 추적추적 들러붙은 꽃잎엔 눈을 씻고 봐도 고상한 자태의 그림자마저 찾을 수 없다.

하얀 목련이 찾아왔나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꽃샘바람과 봄비가 고운 꽃잎을 순식간에 절단내버렸다. 불청객은 목련꽃 피는 날을 잘도 알아낸다. 하얀 화려함이 눈부신 탓이라면 그 누구를 원망할까. 백악기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기나긴 세월동안 진화한 결과라 하기엔 목련화의 운명은 너무 덧없고 허무하다. 아쉬운 것만큼 더 귀하고 아름다운 건지 알 수 없긴 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꽃샘바람과 봄비의 시샘이 원망스럽다.

근 일 년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두 피로감에 지쳐있다. 주눅 들고 우울한 기분으로 봄이 봄 같지 않다. 화사한 꽃으로 나마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달래보고자 했더니 그나마도 도루묵이 됐다. 봄비 내린 거리엔 흰 눈 내린 듯 목련 꽃잎이 널브러져 있다. 마스크를 한 연인이 봄비 속을 거닐며 슬픈 추억을 삼킨다. ‘하얀 목련’이란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가곡 ‘목련화’와 조지훈 시인의 ‘낙화’가 뒤섞여 입가에 맴돈다. “하얀 목련화야,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할 소냐.” 자연의 섭리에 따라 봄이 또 돌아오면 목련꽃을 다시 만날 터이니 너무 안타까워 할 일은 아니다. 다만 흘러가는 세월 속에 돌아올 봄이 몇 번이나 남아있을 런지 그것이 서럽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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